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Oct 08. 2023

믿어야 할 존재를 믿지 못한 대가

세 번째 지혜

: 함부로 추측하지 마라


선과 악의 갈등은 결과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갈등은 진실과 거짓 사이에 놓여 있다. 진실에는 갈등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모든 갈등은 거짓의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진실은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존재한다.

거짓은 우리가 만들어낼 때만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만 유지된다. 거짓은 단어의 왜곡이며 메시지에 담긴 의미의 왜곡이다. 그 왜곡은 인간의 마음이 그러하듯 믿음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거짓은 실재가 아닌 우리가 창조한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거짓에 생명을 불어넣고 마음속 가상현실을 실재하는 현실로 믿는다.


《이 진리가 당신에게 닿기를》돈 미겔 루이스 외



자녀에 대한 의심, 흔히 하는 추측이다. 의심의 시작은 추측이다. 추측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걸 진실인양 붙잡고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의심이라는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거짓은 일방적이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장 필요한 관계이지만, 믿음이 가장 약한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끊임없이 추측과 거짓, 진실의 왜곡이 이어진다. 


나를 믿어주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내 진심을 몰라주는 게 서운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더 답답했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처럼 견고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입을 닫았다. 입을 닫고부터는 부딪치는 일이 줄었다. 충돌이 없어졌다고 해결된 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용암이 불을 뿜듯 감정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반복될수록 지쳤다. 지칠수록 마주하는 횟수도 줄었다. 대화자체가 무의미했다. 당신은 어떤 확신으로 나에게 강요하듯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확신에 대한 설명도 없이 잠자코 살으라는 말이 나에겐 상처가 되었다. 결국 당신의 '추측'으로 모든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의 태도를 더 이해하려고 안 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어머니의 진심을 추측만 했고 입을 닫는 걸로 결론지었다. 


나도 두 딸을 키우고 있다. 큰딸은 중학교 2학년이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부모 뜻에 순종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부딪칠 일이 없었다. 일방적인 소통이었다. 부모가 가진 힘으로 통제가 가능했다.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는 문제가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정작 문제는 사춘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전과 달라진 태도와 말투를 이해하기보다 통제의 꼬투리로 삼았다. 내 뜻과 다르게 행동하는 게 눈에 거슬렸다. 내 입맛에 맞게 행동하길 바랐다. 통제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통제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통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통제 대상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큰딸의 일과에 일일이 간섭할 수 없기에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이기에 가만히 두고 보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내가 정한 기준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불안했다. 정해놓은 대로 하지 않으면 온갖 추측이 시작됐다. 이유를 캐묻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때는 믿음보다는 충돌이 싫었던 것 같다. 자칫 내 행동이 아이에게 반항의 빌미가 될까 싶었다. 행동을 조심하는 게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걸로 이해했다. 한편으로 이런 소심함이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추측대신 믿음의 기초가 되었다.


믿음이 자리 잡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의심보다는 믿음이 51퍼센트다. 쉬는 날 몇 시간씩 이불인양 침대와 한 몸으로 있는 걸 보면 여전히 답답하다. 시간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다. 답답해하고 안쓰러워 보이는 건 내 추측일 수 있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의심일 수도 있다. 큰딸은 자기 나름대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시간으로 보내는 걸 수 있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내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 아니, 틀렸길 바라며 의심을 내려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추측과 의심은 다툼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도화선이 없으면 불이 붙거나 폭탄이 터질 일 없다. 내가 믿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런 노력에 아이는 또 다른 믿음으로 보답해 준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태도는 어쩌면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성인으로 완전히 독립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지 못했을 수 있다. 나 조차도 알게 모르게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했던 아닐까. 그러니 어머니도 당신의 역할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결국 당신의 추측이 정답이고 이를 통해 자식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의 이런 추측도 어머니와 대화를 통해 진실을 알 수 있다. 서로의 진심을 알 때 오해도 풀린다. 오해가 풀리면 추측할 일도 없어진다. 내가 딸을 믿는 것도 딸의 진심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큰딸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안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알아서 해내는 중이다. 부모인 나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믿어주면 된다. 쓸데없는 추측은 오해와 거짓된 관계의 빌미가 될 뿐이다. 내 딸과는 이대로 계속 믿음이 바탕이 되는 관계로 이어가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떻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마치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안고 사는 것 같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궁금하지만 차마 열 용기가 안 난다. 내 책을 선물할 때 '이제는 자신을 믿고 용기 낼 때'라고 적어 준다. 나에게도 이 문장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언젠가는.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충만해지는 '관심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