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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27. 2023

누구에게나 글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금요일 퇴근길은 평소보다 30분 더 걸린다. 강변북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외곽순환도로를 타는 게 그나마 덜 막힌다. 대신 톨게이트 세 곳, 4,000원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강변북로보다 20km 이상 돌아가지만 1시간 정도 아낄 수 있기에 기꺼이 낸다. 


1시간이면 올 길을 1시간 반이 걸려 도착했다. 오는 동안 고민했다. 쏟아지는 졸음 탓에 집으로 곧장 가고 싶었다. 집에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단골 카페로 갔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을 뚫을 기세로 노려봤다. 꿈 쩍 안 한다. 무슨 내용을 쓸지 낙서도 하지만 마뜩잖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저리주저리 끄적거렸다. 그러다 문장 하나가 걸렸다.


'마음이 쫓긴다.' 그랬던 것 같다. 글 한 편 쓰자고 자세를 바로잡으면 그때부터 마음이 요동친다. 시간 안에 마치자, 이왕 쓰는 거 제대로 써보자, 무슨 말을 전하고 싶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내용은 쓰는 게 맞을까? 다른 내용이 낫겠다 등등. 머릿속에서 편집하고 칼질하고 짜 맞추느라 바쁘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도 여유가 사라진다. 스스로 쫓긴다. 어떤 날은 이미 갈피를 못 잡고 포기하고, 다른 날은 근근이 붙잡아 옆에 앉힌 뒤 써낸다. 욕심 같아서는 언제나 마음을 통제하고 의지 껏 써내고 싶다. 남들과 다른, 차별화된 나를 만들고 싶다. 한결같이 쓰고 싶은 글을 써내는 의지의 작가이고 싶다.


어떤 날은 술술 써진다. 마음도 고요하다. 그분이 오신 듯 그 순간에는 나만 존재하는 것 같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마음껏 써내고 나면 뿌듯하다. 내 안에 이런 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안타까운 건 매번 그렇지 못하다는 거다. 그 속을 알 수 없다. 알아보려고 해도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속내를 알았다면 자유롭게 통제가 가능했을 터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매일 쓰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평정심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잘 써지든 안 써지든 평정심을 지킬 때 결과도 만족스럽다. 잘 써질 때의 평정심은 나대지 않게 잡아준다. 안 써질 때의 평정심은 다시 쓸 용기를 준다. 결과에 일희일비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지킨다면 언제나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어쩌면 자기 존중감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상황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게 나를 지키는 길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결과에 대해 핑계대거나 자만해하지 않는다.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중심을 잃지 않게 해 준다. 그런 마음이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지켜준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채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그에 맞게 반응할 수 있다. 알아채지 못했을 때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기껏 술과 음식으로 위로하는 게 전부였다. 다른 처방이 필요했을 텐데 그렇게 못 해줬다. 글을 쓰고부터는 그나마 알아채는 기회가 많아졌다. 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부터 끊었다. 술에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차분하게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할까. 술을 마신 건 술이 나를 위로해 줄 거라고 무의식 중에 믿고 의지했었기 때문이다. 마시는 중에도 마시고 난 후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술로 인해 감정만 격해지고 숙취만 남고 그런 내 모습에 더 자괴감이 커졌다. 악순환이었다. 


월급쟁이, 작가, 강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요즘 심란할 때가 더 많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월급쟁이로만 살 때보다 다양하고 많아졌다. 그런 데도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사는 것 같다. 술 없이도 마음은 늘 평온하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게릴라 전을 벌여도 쉽게 휩쓸리지는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쓰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잘 써져도 안 써져도 꿋꿋이 썼다. 잘하면 하는 대로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나를 아꼈다. 내가 나를 아끼지 않으면 결국 나만 손해다. 지금 이 순간도 내일도 글을 쓰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건 나다.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응원해 주는 게 필요하다. 그런 나라면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크게 상관없다. 잘 써지는 날의 나도 나고, 안 써지는 날의 나도 나다. 따로 떼어놓을 수 없으니 모든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는지가 더 중요하다. 내용을 잘 쓰는 건 기술을 배우면 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기술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직접 경험했을 때에만 저마다 얻어지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게 치유일 수도, 위로일 수도, 자존감을 높일 수도, 응원과 격려일 수도 있다. 잘 쓴다고 우쭐해 말고, 못 쓴다고 비난할 필요 없다. 어느 경우이든 하나의 자기만 있을 뿐이다. 그런 나를 아끼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를 통해서만 변치 않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러니 누구에게나 글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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