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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04. 2024

뇌과학과 글쓰기

싱크대 위 전구가 고장 난 지 3개월도 더 지난 것 같다. 세 개 중 가스레인지 위 전구가 꺼졌다.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은 아내는 불편해했다. 가끔 조리대에 서는 나도 불편했다. 한 달 정도 지나 새 전구로 갈아 끼웠다. 그마저도 원래 것보다 크기가 작은 탓에 천정에 구멍이 났다. 그리고 며칠 뒤 가운데 전구도 고장 났다. 새로 끼운 전구가 밝아서 그나마 버티는 중이다. 아내는 나머지 전구도 갈아주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나도 고장 난 전구와 크기가 작은 전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싶다. 언제까지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교체해야 할 전구는 천정 속에 들어가는 매입 등이다. 크기가 같은 등을 사서 갈아 끼우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다. 위험하거나 복잡한 것도 아니다. 요령만 알면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다. 가스레인지 위 크기가 작은 전구도 어렵지 않게 갈아 끼웠다. 크기가 맞는 전구만 사면 두 개 교체하는 데 10분도 안 걸린다. 인터넷 쇼핑으로 얼마든 살 수 있는 제품이다. 그보다 사무실에서 횡단보도 건너에 있는 조명기구 매장에서 사면 배송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거의 매일 퇴근하며 그 앞을 지나면서도 전구를 사러 가지 않았다.


전구를 갈아 끼우지 않으면 요리할 때만 불편하다. 그렇다고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불편도 아니다. 불편으로 인해 가정 경제에 영향을 주는 건 더더욱 아니다. 어쩌면 심각한 수준이 아니기에 아내도 참고 기다리는 것일 수 있다. 만약에 먹고사는 문제였다면 단박에 교체했을 것이다. 반대로 생존과 연결된 일을 미룬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당장 불편해지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알아서 했을 테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었다. 직장에 다니는 요즘도 미루는 습관은 여전하다.


이제까지 일하며 생긴 미루는 습관은 마치 실 몇 가닥으로 버티는 구멍 나기 전 양말 같았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을 만큼만 근근이 버텨냈었다. 주어진 일을 미리 끝마치면 성취감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시간을 끌 때까지 끌다가 겨우겨우 마무리 짓다 보니 성취감보다 안도감이 더 들었다. 일을 끝낸 건 똑같지만 일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쩌면 성취감은 자신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안도감은 자존감만 갉아먹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일에 자신감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나처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을 뇌과학에서는 이렇게 진단한다. 자신을 오늘 보다 내일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런저런 이유로 해야 할 일을 못했지만, 내일 분명 오늘 하지 못한 일을 꼭 할 거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다짐처럼 되지 않는다. 한 번 미루면 두 번 미루는 게 쉬워진다. 그러다 결국 목구멍까지 찼을 때 억지로 억지로 끝낸다. 그러니 일이 재미있을 리 없고, 맡은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도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18년 동안 꾸역꾸역 내 일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글쓰기는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써보고 싶어 한다. 마음먹는 사람만큼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나같이 이유는 있다. 저마다의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미루는 데는 앞서 말한 진단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스스로를 믿는 거다. 오늘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일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18년이 지났어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걸 보면 짐작해 볼 수 있다. 6년 동안 글을 쓰면서 깨달은 하나는 오늘 써야 내일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미루는 습관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 뇌는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했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해야 할 일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한 번에 다 하기보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거다. 크기를 줄일수록 부담도 줄고 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둘째, 주변 환경 정리를 통해 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약간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도 미루는 습관을 없앨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 마지막은 그 일을 해낸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다. 일종의 보상이며 훌륭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글을 써보고 싶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한다면 앞의 방법대로 실천해 보면 좋겠다. 우선 분량을 정하는 것이다. 하루 동안 적어도 이 정도는 쓰겠다는 분량을 정하는 거다. 단 몇 줄도 좋다. 남에게 보이는 게 아니니 부담 없이 쓴다면 몇 줄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때와 장소를 정하는 거다. 일어나서 식탁에서 쓴다거나, 자기 전 침대에서 쓴다거나, 점심 먹고 사무실 책상에 쓰겠다고 정한다. 무엇보다 오늘 써야 할 글을 썼을 때 성취감 느낄 스스로를 상상하는 것이다. 기분 좋은 상상은 결국 자신을 움직이게 할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오늘 쓰지 않았는데 내일 더 나아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 더 나은 자신이 기대된다면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단순한 진리를 몰랐기에 18년 동안 내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글쓰기만큼은 감히 말할 수 있다. 매일 쓴 덕분에 내일 더 나아질 나를 기대하게 되었다고. 오늘 쓸 글을 미루지 않았기에 내일 쓸 한 문장은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뇌는 믿는 대로 된다고 했다. 미루지 않고 오늘부터 시작하면 어제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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