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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23. 2024

대가를 지불하시겠습니까?

"여전히 책에 적었던 일상을 살고 계십니까?"

"당연하죠. 사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민남형이 회사 앞으로 찾아와서 점심을 같이 했다. 음식을 주문한 뒤 첫마디가 지난번 책 다 읽었다며 여전히 같은 일상을 살고 있냐고 물었다. 숨도 안 쉬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많은 걸 포기하고 얻어낸 일상이라 대답도 쉬웠고 당당했다. 누가 언제 물어도 내 대답에는 변함없을 것이다. 나의 오늘은 여전히 대가를 치르며 지켜내는 중이니까. 


원래 나는 게으른 사람이었다. 직장에 다닌다고 다 부지런한 건 아니다. 하루에 절반을 직장에서 보내고 남은 절반은 나를 위해 썼다. 남은 반의 2/3는 잠을 잤고 남은 1/3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나는 오롯이 나를 위해 썼다. 눈과 귀가 즐거운 것만 쫓았다. 영화 보는 게 취미였고, 술자리를 찾아다녔고, 그렇지 않을 땐 자거나 멍 때리는 게 전부였다. 가정에 충실하기보다 나를 위한 시간을 더 가졌다. 한 마디로 시간 때우기 위해 시간을 썼다. 그러고 나면 늘 후회만 남았다. 시간이 아까웠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변화를 바랐지만 대가는 치르고 싶진 않았다. 변화에 대한 선명한 목표가 없었다. 목표가 선명하지 않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더 솔직히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 몰랐다.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다 한 번 각오를 다져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때는 개나리가 필 때 각오를 다졌다가 질 때쯤이면 의지도 시들해졌다. 그렇게 일 년에 몇 번씩 피고 지기를 반복했었다. 늘 설레어 시작해 보지만 얼마 못 가 포기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시간을 낭비해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반대로 시간을 얻기 위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책을 읽게 되면서 깨달았다. 어쩌면 지극히 단순한 논리이다. 책 읽을 시간이 필요하면 영화 보고 술 마시고 멍 때리는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지친 나를 위한 휴식 시간도 필요하지만, 결국 후회가 더 크다면 분명 잘못된 선택이다. 반대로 변화를 위해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은 나에 변화와 성장을 돕는 시간이다. 똑같이 나를 위한 시간이지만 결괏값은 다르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이왕이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걸 선택했다.


그렇게 7년을 이어왔고, 민남이 형의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내 대답에는 적어도 못마땅했던 나보다 달라진 지금의 나가 더 당당하다는 의미도 있다. 그만큼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7년 동안 포기했던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그때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난 7년도 그저 그런 시간으로 채웠을 거다.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매일 영화 보고 술 마시고 멍 때리고 재미만 쫓는 그런 일상을 살아왔을 거다. 그리고 다시 후회와 각오를 다지며 새사람이 되길 '희망'만 했을 거다.


우리가 변화를 결심하는 계기가 크게 세 가지라고 한다. 죽을 고비를 넘겼거나, 배움을 통해 깨달았거나, 아니면 여러 자극에 의해 변화를 결심하게 된다. 어떤 경우이든 그 시작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죽을 고비, 공부, 다양한 자극 중 어떤 것도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내 경우는 배움과 여러 자극이 계기가 됐던 것 같다. 그걸 시작으로 재미와 즐거움을 포기했고 결국 지금의 가치 있는 삶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 삶은 더 나아질 것이다. 오늘도 대가를 치르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글을 써보고 싶은 사람, 더 잘 쓰고 싶은 사람, 책을 내고 싶은 사람, 책을 많이 읽고 싶은 사람 등 주변에 다양하다. 그들은 나에게 묻는다.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내가 아는 방법은 하나다.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지금 보고 싶은 영화 대신 글을 쓰고, 술자리 대신 도서관에 가고, 쇼핑 대신 책을 쓰고, 낮잠 대신 책을 읽는 것이다.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내가 말하기 이전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리이다. 다만 선택할 용기,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아직 없을 뿐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직 때를 못 만났을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생존이 걸린 더 시급한 문제가 눈앞에 있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런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럴 자격 있는 사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없다. 선택에는 책임만 따를 뿐이다. 그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책임을 감당할 자신 있을 때 대가를 지불한 용기 내면 된다. 그때부터 시작이다. 글을 쓰든 책을 읽든 변화와 성장을 바라든 말이다. 다만 너무 늦지 않게 용기 낼 수 있길 바란다. 이제 인생 절반 살았지만 지나고 보니 한순간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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