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에세이 #04
페이스북에서는 동의하지 않는 일에 No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방이 마크 저커버그라 해도 말이다. 당장의 대안이 없어도 된다. 자격이 따로 필요한 것도 아니고,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짝다리를 짚고, '마크, 난 다르게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굉장히 많이 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으면 된다.
마크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를 말하거나, 아니면 추가적인 질문을 한다. 반대를 했다고 페널티를 주지도 않지만, 용기를 내서 의견을 말했다고 그 사람을 더 배려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원래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에게 예스맨은 경멸의 대상이다. 상사의 말이라면 빤스만 입고 동네 한 바퀴를 뛰어갔다 올 것만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게다가 어떤 이유로든 간에, 그가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면 그 밑의 팀원은 죽었다고 보면 된다. 상사의 무리한 요청에 중간 관리자가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하면, 이 산에 올라갔다 저 산에 올라갔다 헥헥거리다 정신 차리면 늘 제자리다. 등산은 체력이 좋아지고 정신도 맑아지지만, 예스맨 상사와의 직장생활은 지옥과도 같다.
그런데, 직장에서 금기시되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No'다. TV드라마를 너무 오래 보고 온 똘망똘망한 신입 사원이, '부장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이 선임 대리의 한숨소리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저녁 약속을 취소한다. 부장님의 일장연설이 시작되고 회의는 안드로메다를 향해 떠나가는 은하철도 999처럼 흘러간다. 마음이 약한 분들은 부장님 모르게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직장에서는 사실상 Yes와 No가 모두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바로 '침묵'이다. 이 말이 좀 심하게 들린다면 '암묵적 동의'라고 하자. 그냥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회의 시간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꺼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이 심각한 이유는 '시간이 흘러도 개선되기는 커녕, 더 학습된다'라는 점에 있다. 심지어 좋은 상사를 만나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꽤 괜찮은 회사를 다녀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의 트라우마로 인해 사람들은 여전히 회의 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다. 'No'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그렇다.
우리 회사는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축하의 말부터 먼저.
그런데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회의를 떠올려보자. 잘 기억이 안 난다면 다음 번 참석하는 회의에서 사람들이 'No'를 말하는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자. 사람들이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가, 아니면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하는가?
우리는 동쪽으로 가야 해요. 한 명이 이렇게 말하면,
아,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서쪽으로 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답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동쪽으로 가는 것에 반대(No)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각이에요'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록 자신이 말하는 맥락과 관계없이 모든 의견을 '긍정'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먼저 위 대화를 좀더 확장해보자.
A: 우리는 동쪽으로 가야 해요.
B: 아,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서쪽으로 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A: 서쪽도 괜찮네요. 그럼 이제 동쪽으로 가기 위해 차를 몰고 갈까요, 버스를 탈까요?
B: 차를 몰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특히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휴게소가 마땅치 않아서요.
C: 휴게소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남쪽으로 많이 가봐서 알고 있는데...
물론 과장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같다. 문장을 끝까지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찬성하고 있는지, 반대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No를 말할 때 상대방을 너무 배려하는 나머지, 관점이 불분명해지고 회의가 늘어지며 논의가 하나로 모이지 않게 된다. 좀더 냉정하게 이야기한다면 위 대화에서는 사실상 Yes도 없고 No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좀더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글의 제목에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란 표현을 썼다. 의무도 아니고, 용기도 아니다. 권리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권리는 모두가 공감하는 무엇이다.
2.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얻어내는 것이다.
3. 사용하지 않은 권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리면 그 상황은 언제까지고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놓고, No라고 말할 수 있는 회사로 직장을 옮기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일단 시작하고, 부딪히고, 그리고 스스로 '정말 할만큼 했다'라고 느낄 때 대안을 찾는 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방식이다.
다만,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필요하지 않다. 반대를 '연습'할 필요 또한 없다. Devil's advocate라는 표현이 있다. 일부러 회의에서 반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방식을 적용하면 No는 그 본의적 가치를 잃고 희화화된다.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이다. 본인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간결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논쟁은 치열하게, 열기는 회의실 안에 남기면 된다. 특히, 그만큼 서로를 믿을 수 있는 동료 사이에서라면.
페이스북에서는 누구나 No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실제로 페이스북 안에서 누구나 No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개인차는 존재하며, 특히 일본과 한국처럼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렇다. No를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 수는 있으나, 역시 사용하지 않으면 권리는 소멸된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No를 이야기할 수 없다면 페이스북으로 이직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No는 반대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