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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석 Dec 12. 2017

호칭과 수평문화

#직딩에세이 #08

페이스북 코리아에는 있고 페이스북 본사에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칭'에 관한 규칙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누군가를 '어떻게 불러야'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페이스북 코리아의 호칭규칙은 다음과 같다.


1. 직원은 자신의 한국이름 혹은 영어이름 둘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있다.


가령 내 경우에는 한국 이름인 '형석'을 그대로 쓸 수 있고, 세레명인 '대니얼'을 쓸 수도 있다(물론, 세레명 말고 다른 원하는 영어 이름도 가능하다). 한국 이름을 영어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도 있고, 한국 이름의 이니셜이나 느낌과 비슷한 영어 이름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형석을 영어로 하면 Hyungsuk이다. 처음 만난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Hyung'이란 발음도 굉장히 어려울 뿐 아니라, 'Suk'을 발음하는 것도 난감하다. 'Hyung'은 '횽'으로, 'Suk'은 '숙'으로 부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국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처음 인지한 것은 거의 20년 전, 구청에 여권을 처음으로 만들러 갔을 때였다. 'Hyeong'와 'Hyung' 중에 선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는데, (그 당시에는 영어를 굉장히 못했기 때문에) 왠지 ck로 끝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해서 'Suck'으로 여권 신청서에 썼던 것이 문제였다. 내 여권 신청서를 받으신 구청 직원분은 한참이나 말이 없으시다가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Suk'이나 'Seok' 중에 선택하는 것이 어떠냐고 되물어주셨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단어의 뜻을 즉석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아무리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도 뭔가 안 좋은 뜻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구청 직원 분의 추천을 받아 'Suk'으로 영문 이름을 지었다. 이름도 모르지만, 지금도 가끔씩 그 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복 받으실 거에요!).


'Hyungsuk'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Daniel'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먼저 Daniel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면, '호칭 상으로만' 이 이름을 쓸 것인지 아니면 회사 시스템에 이 이름을 등록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Hyungsuk Kim, Daniel Kim, Hyungsuk Daniel Kim 옵션이 있다. Daniel이라고 호칭을 부르게 하고 시스템엔 Hyungsuk Kim으로 등록하면,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부르긴 좋지만 사내 시스템에서 나를 찾지 못한다. Daniel Kim이라고 등록하면 이번에는 한국 사람들이 나를 찾기가 어렵다. 명함을 회사 외부 사람에게 줄 때에도 그 때마다 '오호, 당신은 대~니얼 이시군요' 하는 농담을 들어야 한다.  Hyungsuk Daniel Kim은 너무 길다. 복잡한 것을 딱 싫어하는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Daniel Kim이나  Hyungusk Daniel Kim은 페이스북에 등록되어 있는 내 프로필명인 Hyungsuk Kim과 맞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난 (외국인들이) 발음하기는 어렵더라도 Hyungsuk Kim이란 여권 이름이자 페이스북 프로필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한 번 발음하기는 어렵다라도 일단 인식하면 오래 기억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외국 동료들을 처음 만나서 내 이름을 설명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설명하는 것도 요령이 생겨서 '처음 만나 할 말 없는 상태'에서 나름의 스몰톡(Small Talk)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다. "Hello, I'm Hyungsuk Kim and (잠깐 뜸 들이고) I know it's very difficult to pronounce it..."은 밍글링 세션에서 시간을 보내는 낙이 되기도 했다.


Hyungsuk이란 이름을 사용했을 때의 한 가지 보너스가 있었는데, 회의 시간에 외국 동료들이 내 이름을 많이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페이스북에 입사 초기에 가뜩이나 '영어 듣기'가 좋지 않았던 내가 회사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나는 마음껏 질문하고, 그들은 내게 제대로 질문하지 못했으니까. 주어를 대충 빼먹고 말해도 되는 한국과는 달리, 영어권에서는 여러 명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특정인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도 있었는데 친한 페이스북 동료 중에 'Hyunsuk(현석)'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g자 하나 차이로 발음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을 외국 동료들은 놀라워했고, 메일을 보낼 때(페이스북은 사내 시스템과 연계된 아웃룩을 사용한다) 자동완성 기능에 따라 Hyunsuk에게 보낼 이메일이 Hyungsuk한테 오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우리는 서로 성격이 매우 달랐는데(업무지향적인 Hyungsuk과 관계지향적인 Hyunsuk), 외국 동료에게 둘의 이름을 설명할 때 이런 포인트를 재미있게 잘 써먹기도 했다. 

 

2. 누군가를 부를 때는 '이름+님'으로 부른다.


한국 동료가 내 이름을 부를 때는 '형석님'이 되다. 내가 'Ben' 이란 이름을 가진 동료를 부를 때는 '벤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가령 '벤님, 내기 하나 하시겠어요?' 이렇게 물으면 '무엇을 걸까요, 형석님'하는 답변이 오는 형태이다. (페이스북 코리아 분들이라면 여기서 빵떠졌을 텐데, 그 이유는 생략)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영어로 이름을 부를 때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님'자가 빠지게 된다. 'Ben, would you like to bet?과 'What do you want to bet, Hyungsuk?'이 되는 것이다.


눈치채셨겠지만, 영어에는 '님'자라는 것 자체가 없다. 미국에서 오래 사셨던 분들은 영어에도 높임말에 준하는 엘레강스한 표현이 있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으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을 대변해서 이야기하면 영어에는 '님'자가 없다. 마크에게 무엇을 말할 때는 그냥 'Mark, ~'로 말하면 된다.


3. 호칭 다음에는 모두 존댓말을 사용한다.


직급이나 나이, 입사 경력에 관계 없이 업무 관련하여 한국말로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 존댓말을 사용한다. 먼저 들어왔다고 선배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것도 없고, 서로 나이를 물어보는 일또한 찾아보기 어렵다(나는 아직도 페이스북 직원 상당수의 나이를 모른다). 직급이 높든 낮든 간에 대화할 때는 항상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오히려 '지사장님, ~'하고 부를 때는 뭔가 불만을 얘기하거나 장난을 치고 싶을 때다.


회사 밖에서 알던 사람들 중 '나이가 같은(친구 사이인)' 사람이 페이스북으로 들어온 경우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회의 때나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서는 서로 존대말을 사용한다. 반면, 둘만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라면 서로 '님'자를 빼고 이름을 불러도 상관이 없다(ex: 현석이 형석에게 '형석아, ~'). 문제가 되는 것은 둘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대화와 전혀 상관이 없는' 제 3자가 주변에 있을 때다. 이 경우, '둘 간의 대화'이기 때문에 서로 ('님'자를 뺀) 이름을 불러도 되는지, 아니면 오피스 안에서는 반경 3M 이내에 누군가가 있는 경우 모두 '님'자를 붙여야 하는지는 종종 논의의 대상이 되곤 했다. 


둘만 이야기하는 경우에도 오피스에서 늘 '님'자를 붙여야 한다면, 회식 자리에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등으로 이어지곤 했는데 페이스북 자체가 '최소 가이드의 규칙'을 선호하기도 하고, 이미 호칭 관련하여 한국 오피스에만 있는 규칙이 (페이스북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복잡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어느 정도 각자의 선택에 맡겨지곤 했다.  그러나 '권장사항'은 어쨌거나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는 것이다(참고로 내게 '권장'이란 단어는 큰 의미가 없긴 했다. '강제'가 아닌 이상 판단과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니까). 다만, 원래 알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이 차이가 있는 경우에 '형'과 같은 호칭은 오피스에서나 회식 자리에서나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4. 외부 직함은 오피스 내에서 서로를 부를 때는 무의미하다.


대표건, 부사장이건, 이사건, 팀장이건, 매니저건 간에, 직함의 목적은 페이스북 외부의 사람을 만날 때에만 의미가 있다. 페이스북 내에서는 광고주나 기자, 초청인사와 같이 외부 사람이 동석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이름+님'자를 부른다. 


그렇다면 외부 사람이 동석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런 부분까지 가이드화 하지는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서로를 부른다. 다시 반복하면, 페이스북은 '최소 가이드의 규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이스북 코리아는 왜 이렇게 '호칭'에 대해서 별도의 규칙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직급을 떼 버리고 직접 이름(+님)을 부르는 것이 오피스 내에 수평문화를 형성하고,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비슷한 예로, 카카오에서도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는데, 페이스북과 차이가 있다면 1) 무조건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하고, 2) 대신 '님'자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카카오의 방식을 더 선호하긴 한다.


최근 들어 '호칭파괴'를 고려하는 회사들이 많이 늘어났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상무, 부사장, 대표, (심지어 부회장, 회장)에 이르기까지 복잡 다단한 직급을 없애거나 단순화하고, 최소한 호칭 상에서 ('님'자가 있든 없든 간에) 서로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권장하는 추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직 내 의사소통이 조금이라도 더 원활하게 진행되고, 직급에 관계 없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기 위함이다. 


다만, 이렇게 직급파괴나 호칭파괴를 할 때 '예외를 두는 것'은 (최소한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일반 직원들은 모두 호칭을 없애고 임원 이상만 '상무님, 대표님' 등의 호칭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는 너네와는 달라'와 같은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할 거면 확실하게 다 없애고 통일하거나, 아니면 직급이나 호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한 후 이런 이야기를 해서 좀 난감하겠지만,


사실 나는 우리나라에서 '호칭이 수평문화에 끼치는 영향'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호칭을 없애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좀더 자유롭게 이야기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호칭이 없어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말을 조심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표님, 상무님, 부장님 등으로 말을 시작해도 (어디로 끌려간다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평문화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나는 '직급이 포함되지 않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의 호칭을 사랑한다.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를 부름에 있어 불필요한 단어들을 많이 생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부문장이 5명 들어있는 회의에서 어떤 부문장 한 명을 지칭하여 의견을 내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부문장님!'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돌아보기 때문에, 'OOO 부문장님!'이라고 말을 시작해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논의가 진행될 수록 그냥 이름(+님)을 부르는 것과 이름+직급을 부르는 것은 정작 풀어야 할 논점에 집중하는데 꽤나 성가신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말 연초의 인사변동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첫 직장에서 '직급을 잘못 불러서 끌려갔던' 경험 이후, 이름+직급을 매번 신경써서 불러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내게 큰 부담이었다.


오늘의 결론. 


이름을 부르는 것이 수평문화에 도움이 되는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굉장히 '편리한' 제도인 건 틀림없다. 어차피 페이스북 본사에는 없는 제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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