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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석 Dec 24. 2017

다이-버씨티(Die-versity)

#직딩에세이 #23

페이스북은 글로벌 회사답게 '다양성(diversity)'을 매우 강조한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실제로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직원으로서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현상이라도 어떤 앵글을 통해 바라보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우리는 통상 이것을 '관점'이라고 부른다.


마크가 인터뷰 때 자주 말하던 내용이 있다. (너무 좋은 문장이니 번역은 생략)


When you give everyone a voice and give people power, the system usually ends up in a really good place. So, what we view as our role, is giving people that power.


'목소리(a voice)'라는 단어는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그것이 '어떤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everyone)일 때 더욱 그렇다. 회사를 다니면서 늘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일종의 '자격 혹은 권력'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나요.

10년 이상 그 일을 하기 전에는 어디 찌그러져 있으세요.

일단 성공한 뒤에 이야기하시죠.

빈수레가 요란한 법.

그래요, 당신 잘난 거 알아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넌 도대체 생각이 있니 없니.


어려서부터 '말할 때'와 '들을 때'를 구별하는 능력을 배우고, 사실 '듣는다는 것'이 미하엘 엔데의 모모처럼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제서야 사회는 '어른'이란 딱지를 준다. 더 이상 날 수도 없고, 원더랜드 같은 곳도 가지 못하고, 머리도 빠지고, 주름살도 생기고, 그렇게 나이를 먹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 또한 누군가의 의견일 뿐이다. 그것이 '아주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된다. 만약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의견과 많이 다르다면,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다양성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일부러 모두의 의견과 다른 방향을 애써 찾으려 한다면 문제겠지만(이건 그냥 애정결핍을 가진 청개구리에 지나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면박을 받을까 두려워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많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면박당하지 않을' 상황이 먼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강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설정을 전제로 회의를 진행해보면 굉장히 맥이 빠진다. 어느 정도 맥이 빠지는가 하면, '일부러 반대하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 주도하는 회의만큼이나 그렇다. 모두가 어떤 역할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데, 아무도 실제 배우가 아닌 탓에 이렇게 진행되는 연극은 굉장히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공감을 얻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고. 사실 이런 것이 더 진짜가 아닐까. 


다양성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이상한 삼단논법에 빠진 경우를 많이 보았다.


- 우리는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다.

- 그러므로, 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조직에서 몰아내어야 한다.


다양성의 '사전적 의미'를 고려했을 때 위의 주장은 굉장히 이상한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늘 '다수의 편'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힘도 쎄다. 약자가 한데 모여 회사와 싸우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수사(다양성을 수호하는 사람들)'는 권력 그 자체와 다름 없다. 눈밖에 나면 어떻게든지 회유하거나 괴롭힌다(Bullying). 


그런데 말입니다.


다양성이란 것은 본래 '다수가 아닌' 혹은 '대세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로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실 다양성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에 대한 설명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평생을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일까'란 생각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에게 뭔가가 필요하다면,


니가 그런 것은 니 잘못이 아니야.


이런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이런 사람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우리는 다양성을 중요하니, 니가 우리의 규칙에 따라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로서의 페이스북은 여전히 불완전한 구석이 많다. '특히 왜 저런 내용을 그냥 방치하는 거야, 왜 한국의 (말 잘듣는) 포털처럼 관리하지 않는 거지?'와 같은 비판도 강하다. 물론, 이런 주장의 상당 부분은 맞는 이야기다. 여혐, 남혐으로 대표되는 혐오의 영역, 거짓 뉴스, 도저히 예술의 영역으로 볼 수 없는 외설적 부분 등은 페이스북도 어떻게든 찾아서 페이스북에서 몰아내고 싶어하는 부분이다. Mark's Q&A에서 마크가 이 부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너무나 자주 보았다.


다만,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페이스북에는 정말로 많은 포스팅이 올라오고, 이에 대한 사람의 간섭은 최소화된다. 대부분 알고리즘이 판단하고, 알고리즘이 판단하기 어렵다고 토해내는 부분을 사람이 검토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여전히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 때 가장 믿고 있는 것은 '커뮤니티 스스로의 자정' 역할이다. 페이스북 사용자가 자신이 보는 포스팅 중에 정말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찾아서 리포팅하고, 이러한 리포팅 중에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이고 어느 것이 '선을 넘었는지'에 대해 사용자와 알고리즘이 협업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어렵게 일을 할까. 왜 문제가 되는 부분(리포팅되는 부분)을 그냥 제거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이야기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의 부작용이 훨씬 더 클 수 있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에 정말로 큰 '차별'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을 노예로 다룰 수 있고, 여성은 선거에 나설 수 없고, 같은 성별의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치료받아야 하는 병이라는 생각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그런 모든 역사를 경험한 미국에서조차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되는 수준의' 총기규제조차 제대로 의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라는 것이 실제적 모두가 아니라 '모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한정되었다면 다양성이 그 뿌리부터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은 정말로 최소한의 것들로 제한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어떤 의견을 말하는 데에 있어 '자격이나 조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다양성이 다양성을 죽이는 세상을 막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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