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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석 Aug 24. 2018

정답이 없는 세상에 들어가다

#직장에서 #02

대학은 재미가 없었다.


조금은 더 느슨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으며,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당당하게 민증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본질적으로 삶이 바뀐 느낌은 없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것이 좋은 회사를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으로 바뀌었을 뿐,


수업 시간에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전공 시간에는 중국에 공장을 지어야하는지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20년 정도 후에나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늬만 교양' 시간에는 삶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실종 상태였으며 수업을 듣고 시험 전날 잠깐 기억했다, 답안을 쓰고, 다음 번 쓸모없는 것들을 위해 머릿 속을 초기화하는 익숙한 패턴이 계속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적표에 등수가 빠지면서 비교할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과, 무조건 높은 점수를 받으면 유리해지는 것이 아니라 학점은 일정 범위 내로 관리하기만 하면 되었다는 점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헤어졌고, 군대를 갔고, 반년 동안 런던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졸업까지 남은 것은 두 학기. 


수업시간마다 째던 친구들은 갑자기 성실한 모습으로 학점을 관리하거나 고시같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강의 시간의 풍경은 오히려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때와 조금 더 닮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기업의 채용공고를 살펴보면서 그동안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라고 애써 미뤄왔던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었다.


특별히 가고 싶은 회사가 없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업무도 없었다. 


무엇으로 회사를 골라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어떤 회사든 간에 나를 뽑아야 하는지의 이유를 한 가지도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뭐 하고 시간을 보내버렸던 것일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사실 그 만큼의 시간이 새로 주어진다고 해도 답을 찾거나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떤 회사를 다니고 싶은지와 어떤 업무를 하고 싶은지는 실제로 해보고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회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신입을 뽑았는데 첫 번째는 공채였고, 두 번째는 특정 부서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회사도 모르겠는데 부서까지 누군가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가고 싶은 부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어떤 업무를 할 지 머리 속에서 상상이라도 가능한 부서였으면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마케팅이었고, 마침 부서 단위로 채용 공고가 있었던 회사의 해외마케팅 부서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서류에 붙고 면접을 보러 간 곳은 여의도의 쌍둥이 빌딩이었다. 어학연수 시절에 어떻게든 돈을 아껴서 산 뒤로 옷장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 구두를 꺼내들었다. 분명 어색했음에 틀림없는 모습으로 1층에서 꼭대기를 올려다 보았는데 정말 빌딩이 하늘에 닿을만큼 높았다. 건물 안에는 역시 어색한 모습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거나 뭔가를 중얼중얼 하고 있는 다른 지원자들이 있었는데, 마치 수능시험 직전에 한 줄이라도 더 뭔가를 기억하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살짝 겹쳐졌다.


면접은 다대다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커다란 회의실에 부서장으로 보이는 열 명 정도의 면접관이 있었고, 한 번에 다섯 명 정도의 지원자가 동시에 들어갔다. 그 중의 한 명이 질문을 하면 지원자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방식이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몇 번 갔었던 이대와의 단체미팅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질문을 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다. 차이가 있다면, 선택권이 있는 것은 책상 건너에 있는 사람들 뿐이라는 점이었다. 책상 이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간절한 모습이기도 했고.


면접이 시작되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면접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건너편에 어떤 사람들이 있나, 저 사람은 왜 저런 질문을 하나, 이쪽 사람들은 어떻게 답하나, 그러면 저쪽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것들을 보았다. 분명히 건너편 사람들은 이미 몇 시간째 면접을 하느라 지쳐 있는 듯 했고, 이쪽 편 사람들은 무슨 질문을 받던 간에 로봇처럼 답변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굉장한 경험을 했고, 오래전부터 이 회사에 들어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일이 주어지든 이 한 몸 회사에 바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건너편 사람들은 더욱 지루해했다. 


마케팅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뭔가 나가리판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그다지 말을 하지 않고 있던 면접관 한 명이 쑥 들어와 질문을 했다. 그 전의 면접관들의 질문이 무엇이었던 간에 순간 굉장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학기 초 어떤 수업을 들을 것인가, 어느 교수가 학점을 잘 주고 어떤 수업이 그나마 배울 것이 있는지 갑론을박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쑥 들어와 '그런데 우리는 대학에서 원래 뭘 배우고 싶었지?' 이렇게 물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지원자들이 하나씩 '답'을 말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사람, 미리 준비한 답을 급히 머리 속에서 꺼내는 사람, 뭔가 말하다가 '다시 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정말로 길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 기억, 대응, 초조의 감정들이 사람들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쪽 편 사람들은 너무나도 심각했는데, 책상 건너 사람들은 그런 모습들을 그냥 관찰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 분들이 재밌게라도 즐겼으면 오히려 덜 어색했었을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반드시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가 아니었고 꼭 하고 싶은 업무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다.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여기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대안이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냥 그 상황 자체가 조금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창한 오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빌딩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상황극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다음 순간 꽤 많은 면접관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쟤는 뭐야'라는 살벌한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버스는 떠났고, 그냥 나는 마케팅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마케팅은 음... 뭐랄까 다리? 아니지, Bridge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이쪽에 사람들이 있고, 저쪽에 사람들이 있는데... 그 둘을 연결하는 거에요. 가령, 음... 회사 안에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또... 회사 밖에는 뭔가를 살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 있으니까... 이 둘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또 듣고 하면서... 음 뭐라고 할까, 그 간격을 좁혀 나가는 거죠.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투박하고 거칠었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매끄럽게 정돈되지 않았다.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마케팅이란 것은 백 명에게 물어보면 백 명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뭐 그렇게 정답이란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을 또 머리 속에 외우며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에 와서까지 또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면접은 대략 망쳤다고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나중에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대부분의 면접관이 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조직에 잘 맞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다만, 마케팅이 무엇인지 물었던 면접관 한 명이 '회사에 저런 놈 하나는 있어도 괜찮지'라는 생각을 했고 자신의 부서로 나를 채용했다.


그렇게 나는 정답이 없는 세상에 슬쩍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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