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03
직장에는 모호한 규칙들이 굉장히 많다.
명확히 어딘가에 적혀있는 경우도 많지 않고, 발견한 규정 대로 그대로 따라하면 개념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딱히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용기를 내서 물어보면 사람마다 말해주는 답이 모두 달랐다.
가령 몇 시까지 출근하면 되는가.
분명히 출근 시간은 9시부터였다. 근무 규정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 9시를 넘었을 때 근태시스템에 지각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9시를 출근시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말하며 앉을 수 있는 시간과 모기만한 목소리로 자리에 앉는 것의 차이는 9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직급에 따라 출근해도 되는 시간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서장이나 임원들은 굉장히 굉장히 일찍 출근하곤 했으니까.
얼마 동안의 관찰을 통해 대략 8시반을 기점으로 '안전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피크타임 때의 엘리베이터의 줄이 엄청나게 길다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몰리면 10분도 넘게 기다리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출근의 기준이 회사건물에 들어서는 것이냐, 사원증을 태깅하는 순간이냐, 아니면 자리에 앉는 것이냐의 논란도 종종 있었는데, 이럴 바에야 그만큼 고려해서 일찍 오는 것이 나았다.
줄이 기네.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다 한 마디를 했다. 사실 임원들은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한 동안 8시 반은 더 이상 안전한 시간이 아니게 되었다. 언제까지 와야 하는가? 얼마나 오랫 동안 그만큼 더 일찍 와야 하는가? 그것은 각자의 판단이었다. 답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냥 7시반까지 오기로 했다. 언제까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신입의 정신건강에 더 좋았다.
퇴근 시간은 좀더 어려웠다.
6시에 퇴근해도 되는가? 물어보면 늘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에 가는 대신 저녁을 먹으러 나왔고 약속이나 한 듯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퇴근시간이 출근시간보다 더 어렵다고 느꼈던 것은 사람들이 퇴근하는 시간이 매우 불규칙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는 7시반에만 오면 대략 상위권에 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녁은 달랐다. 다음 날 보고할 것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낮 동안 밀린 업무를 보충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급한 일이 없는데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도 꽤 많았다. 밤 10시를 넘어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운 날이 꽤 많았기 때문에 퇴근해도 좋은 특정한 '시간대'를 찾기는 어려웠다.
처음엔 '남은 사람'을 보고 결정을 했다. 가령 부서원 중 1/3 정도 사람이 남았을 무렵 퇴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책상만 보아서는 퇴근했는지 아닌지의 구분이 꽤 어려웠고, 자꾸 두리번 거리며 숫자를 세기도 귀찮아졌다. 그러다가 좀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는데 '부장님이 퇴근한 후 30분 후'였다. 사실 이 둘의 시간은 묘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보통 신입에게는 엄청난 업무 같은 것들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야근을 하면서까지 할 일이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야말로 바다와 같은 시간이 남는 것인데, 마음 같아서는 다른 사람들의 업무를 돕고 일도 배우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방해만 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7시 이후에는 낮과는 달리,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만든 장표를 보거나 따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툴들을 살펴보고, 엑셀책을 사다가 모르는 함수들을 하나씩 따라해 보기도 했다.
집에 안가요?
이렇게 누가 물으면 '지금 가면 어차피 길이 막혀서요'라고 답을 하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그렇게 속속들이 확인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신입이 집에 안가는 이유'같은 것이 딱히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걱정 때문이 아니라, '집에 안가는 신입'을 불편해 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곤 했다. 눈치없게 오래 일하면 오버하는 신입이 되는 거였다.
출근을 일찍 하고 퇴근을 늦게 하면서 사실상 주중에는 개인적인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 집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은 샤워를 하고 다음 날을 위해 잠을 자는 것 뿐이었다. 열심히 일한다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다. 인정이란 것은 일한 시간이 아니라 실제로 실력이 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신입의 눈으로도 꽤 명확해 보였다.
오히려 부작용이 생겨났다. 근무시간이 길어지면서 낮 동안의 효율성이 급격히 낮아지게 된 것이다. 신입에게는 아직 '일할 체력'이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실수도 잦고, 자신감은 곱으로 떨어져 나갔다.
'적당히'라는 것이 얼마나 고난이도의 작업인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적당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들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 적당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애써 어렵게 발견한 것들도 상황이 바뀌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렇게 항상 스위치를 켜 놓기에는 뭔가 본질적인 것들이 아니라고 느껴졌고, 그만큼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몸은 망신창이가 되어 갔고, 심지어 잘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살피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적정한 수준을 찾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최대한 일찍 오고, 최대한 늦게 갔다. 회식 다음 날은 9시만 넘지 않도록 조심했고, 집중이 안되는 날에는 6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집에 갔다. 대신 회사에 있는 동안은 의미있게 시간을 보내려고 했고,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어설프게 둘러보는 것보다는 언제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그렇게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신입도 회사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