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과 방황, 그리고 개인의 자유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 통제력을 갖는가? 술을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망각과 도피 그리고 해방을 의미한다.
지난 2박 3일간 대학에서 힐링캠프라는 것을 다녀왔다. 상당히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5만 원의 돈만 지급하면 바닷가 앞의 좋은 리조트와 그곳까지 이동하는 버스를 제공한다. 가장 좋은 점은 학교는 딱 여기까지만 개입한다는 점이다. 2박 3일간의 모든 여행은 신청한 학생들이 만들어 간다. 카페에 갈 수도 있고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으며 서핑을 할 수도,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12시까지 잠만 잘 수도 있다. 이렇듯 학생들은 여행에서 숙소와 이동수단을 제외한 모든 선택에 거의 완벽한 통제력을 갖는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통제력을 가질 때 치유받는다. 사회적 관계들에 치이던 삶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사회적 관계는 개인의 선택에 매 순간 개입한다. 핸드폰만 잡고 있어도 일상의 여러 근심이 나를 그 안으로 끌어당긴다. 따라서 호텔 방을 예약하고 핸드폰을 끄기만 해도 여행을 떠나고 치유받을 수 있다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은 매우 타당하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의 공간엔 일상의 근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학생회 임원으로서 참여한 힐링캠프는 나를 힐링시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필수 참여였던 데다가 24시간 선배, 선생님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오히려 더 극한의 사회로 들어온 것 같았다. 회장님이 몇 주 전 이러한 캠프들이 일로서 느껴지는지 휴가로 느껴지는지 물어봤다.
“51% 대 49%입니다. 물론 51%가 휴가입니다.”
말 한마디도 사회생활 중엔 마음대로 뱉을 수 없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힐링캠프를 가는 것이 99%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 말해서 좋을 게 없음을 알았기에 위와 같이 대답했다. 50% 정도 감정의 통제권을 회장님에게 양도한 것이다.
여자친구의 존재는 하나의 관계임으로 많은 결정권을 가져가지만 사회생활에서는 오히려 나에게 자기 통제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여자친구가 있으니 굳이 다른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 꾸밀 필요가 없다. 애인이 없는 곳에서 외모는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정도만 관리하면 된다. 이 사실은 이번 캠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좀 더 후줄근하게 입을 수 있었고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 같은 것들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편하게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또 같은 차장이거나,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 있을 때, 직급을 내려두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자리에 있을 때, 선선한 바람, 밤하늘의 별을 온전히 느끼고 있을 때는 정말 휴가에 온 것 같았다. 그 순간들은 삶을 주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정상에 도달하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돌을 매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도 어쨌든 직접 돌을 굴리지 않는가? 이번 캠프에서 자기 통제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들만큼은 나는 행복한 시지프스였고 그런 순간들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기 통제력이 있다는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좋은 순간들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비극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상했던 비극이지만 생각보다 좋은 순간들에 그 비극이 더욱 부당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행복한 1, 2일 차였다. 그러던 중 저녁 먹기 전의 부회장님의 농담은 나를 심오하게 만들었다.
“내일 6시에 팀장님이 같이 등산 가재”
“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11시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6시에 등산이라니. 그리고 이걸 전날에 말한다니. 농담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안 되면 되게 하여라”라며 군대의 권위적인 사상에 잔뜩 절여져 있고 실제로 전날 본인이 원하는 학생들을 찍어 접대 등산을 다녀온 평소의 모습을 두고 보면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0이 넘어 퇴임을 앞둔 학생복지처 팀장은 술을 매우 좋아한다. 그 때문에 학생회 사람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진다. 물론 필참이다. 행사를 진행하느라 온종일 정장을 입고 뛰어다닌 날 저녁에도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접대 술을 마셔야 했다. 그래서 술을 조금 먹느냐? 그렇지도 않다. 어찌나 술을 잘 마시는지 2, 3분 간격으로 소주를 한 잔씩 마시는데 모두 다 같이 건배를 하고 마셔야 하므로 1시간이면 인당 2병 정도 마시게 된다. 하여 팀장과 함께하는 자리는 항상 부담된다.
학생복지처는 학생회가 행사를 돕고 학생의 복지와 관련된 업무를 맡아 하는 부서로 학생회와 엮일 일이 많다. 하여 팀장은 학생회와 학생복지처가 친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러저러한 자리를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다. 명목적으로는 학생회와 복지처는 수평적인 기관이지만 학생회와 행사에서 쓰는 돈인 교비를 처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사실상 상하 관계이다. 그래서 회장님이나 다른 국장님들도 팀장님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팀장님에 제안에 최대한 동의해 주는 것 같다.
학생회 엠티나 이런 캠프는 팀장님을 거의 24시간 접대하는 자리이다. 저번 엠티 때는 레크레이션에도 참여하여 우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를 놀아줘야 했다. 또한, 본인이 주말에 쉬어야 한다는 이유로 월, 화로 엠티를 잡아두고선 수업을 빠지고 가야 할 뻔하기도 했다. 물론 그 모임들에 많은 돈을 대주고 회식비도 다 내주시지만, 차라리 안 받고 학생들끼리 놀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진짜야 장난 아니야”
1, 2일 차에 해방감을 느껴서인가 부회장님의 말을 듣고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동안 팀장이 만든 여러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그 줄을 끊은 것이다. 무슨 용기에서인가 처음으로 부회장님 앞에서 진짜 가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말이 엄청난 잘못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싫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변인들을 당황하게 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물론 결국 농담이라고 말씀해주셔서 한 시름 놓았지만, 그로 인해 다시 생각난 과거의 팀장에 대한 잔여 분노는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했다.
‘타인과 사회를 위해 자기 통제권을 어디까지 양도할 수 있는가?’
가장 큰 물음이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일까. 리더가 누군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팀장과 같은 권위주의적인 리더가 이끄는 작은 사회에서 이는 잘못이다. 팀장의 제한을 거절함으로써 학생회 일에 도움을 받기 어려워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가 흔들릴 수 있다. 이를 인지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부회장님의 말과 함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이는 소위 ‘현타’가 왔다고 표현하는 상황에 이름이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처음 해보는 많은 사람은 어느 순간이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다. 쌓아오던 자아와 사회가 정면으로 충돌해왔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충돌, 누적된 충격으로 인한 현기증. 이는 스스로 내린 진단명이었다. 딜레마다. 딜레마일 땐 상황을 극한 시켜보는 게 생각의 순서였다. 점점 많은 요구를 하는 팀장의 모습을 그려봤다. 과연 팀장에게 내 장기도 바칠 수 있을까. 회사와 조직, 평판을 위해 내 장기를 때 줄 수 있겠냐는 말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사회조직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을 멈췄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준다. 나치 공무원이었던 아이히만은 그저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 했다. 하지만 그는 수 만 명을 학살하는 계획을 승인한 자였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년 뒤 죗값을 치렀다.
극한의 회사원. 소위 상사와 회사를 위해 헌신하는 충실한 사회인은 아이히만과 같아질 수 있다. 본인의 실존을 회사를 통해 입증받는 그들은 자아마저도 타자화한다. 자신의 몸이 갈려나 가는 지도 모른 채 회사와 존망을 함께한다. 나는 그들이 되어야만 할까. 이 딜레마에서 중도는 어디에 있는가.
팀장은 1년 보고 안 볼 사이다. 내년에 퇴임하기 때문에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사회생활도 하고 자아도 지키기 위해선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선배 A에게 말했다. 선을 넘은 것 같다. 어느 정도는 학생회 체면이 있으니 팀장의 장단에 맞춰주겠으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분명 오늘 저녁 술을 많이 먹을 텐데 어떻게 복귀하는 날 새벽에 일어나서 접대를 하나. 농담이란 것을 확신하지 못했던 나는 그날 아침 등산을 다녀온 A 선배에게 상황을 토로했다. 그런 게 사회생활이라는 말과 내가 아직 미숙하다는 말, 그리고 너도 팀장님이 사준 밥 먹고 좋았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 팀장이 우리에게 밥을 사주니 고마워하라는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진짜 장기를 내놓으란 것도 아니고 같이 산 한번 타주면 되는 일이었다. 팀장은 이제 퇴임할 것이고 나에게 무리한 부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만나는 상사들에게 이대로 할 수 있을까. 사준 밥에 고마워하라는 말은 돈으로 존경을 사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상사가 이렇진 않겠지.’ ‘뭐 할 수 없는 일까지 시키겠어.’ 이런 생각으로 그들이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내 모든 것을 바칠 순 없었다. 선배 A는 상사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생활을 기본이고 앞으로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끝까지 설득했으며 이는 앞으로 사회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게만 했다. 그냥 할 수는 없었다. 사고를 멈추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았다. 분노와 혼란, 복잡해진 사고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피곤했다. 사회에서 부대끼는 정신이 혼미했다. 자고 싶었다. 눈 감으면 사회에게서 멀어지리. 이 순간 내가 자기 통제력을 갖는 방법은 꿈을 꾸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방에 도착한 나는 저녁 먹기 전까지 잔다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당일 11시 즈음까지 잤던 나지만 극심한 피로감에 바로 잠들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꾸지도 않았다. 나는 마치 알베르 카뮈가 자살에 대해 고민하듯. 사회와 부딪히다 일시적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다시 사회로 돌아갈 힘을 얻었는지 잠에서 깼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선배들과 회와 함께 소맥을 들이켰다. 그날따라 술이 잘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하루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마치 이태원 클라쓰의 박세로이처럼 불의에 저항한 기분이었다. 사실 뭐가 정의인지도 모르지만,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에는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든다. 이 순간 강자는 팀장이었고 그를 옹호하는 사회였다. 모든 것은 변하는 만큼 고정된 정의란 없지만 나를 수호하는 일은 시대의 과업처럼, 정의롭게 느껴지곤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잔, 두 잔 들이켠다. 취한다. 점점 사회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술은 도피이자 해방의 수단인가보다. 몸은 점점 통제력을 잃어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할 수 있었던 자아는 통제력, 즉 자유를 갖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팀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방을 돌면서 학생들과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취기가 올라있었던 나는 오히려 팀장에게 예의를 갖췄다. 제정신이 아니니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출 용기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자아를 버릴 용기였나. 체념할 용기였나 보다.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사회적 욕망이 있던 것인가. 이 순간 나는 나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의 용기는 앞서 말했던 시지프스의 용기와 같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용기. 사회와 나를 분리하는 용기를 술로부터 얻었다.
어느덧 새벽이 넘어가고 한참 술에 취했을 때 선배 A가 나를 따로 불렀다. 그리곤 나와 같은 나이인 B와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B는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다른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에게 군대에 다녀온 것처럼 싹싹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사회생활에 능했다.
“인생은 너처럼 사는 것보다 B처럼 사는게 편해 그게 답이야.”
A가 말했다. 아마 아까의 설득이 충분하지 못했나 보다. 나를 설득하고 싶어 하는 의도가 눈에 보였다. 중도를 찾아야 한다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팀장의 말을 무조건 거역하고 내 맘대로 하는 사람처럼 나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했다.
“물론 사회생활도 해야 하지만 자아를 지켜야 합니다. 항상 복종하는 것이 아닌 중도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님은 팀장이 간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을 겁니까?‘
술에 너무 취했었다. 그 순간 나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함으로써 나는 삶의 방향성을 다잡을 수 있었다. 100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의 행동이 중요하다고 했다. 언젠간 직접 말해야 할 일이었다.
”당연하지“
A와 옆에 있던 B가 동시에 대답했다. B는 사회생활은 한 것일까? A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물론 그들도 진짜 간을 빼줄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대체 어디까지 내줄 것인가. 서서히 자신을 잃어갈 것인가? 아직 그들도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말해야 할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누가 성공하는지 내기하실래요?“
미친 소리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나도 많이 답답했나 보다. 내 머릿속에선 A와 내가 아닌 무조건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과 어느 정도 자아를 지키며 사회 생활하는 둘이 싸우고 있었다. 사실 성공은 매우 주관적인 단어여서 판단하기 어렵다. 아이히만도 사실 나치 정권의 권력자였으므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다. 끝까지 조직을 옹호하고 충성했기에 성공했다고 믿을 것이다. 이쯤 되면 성공은 자신의 신념을 설정하고 일관성 있게 이를 달성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신념은 돈이고 누군가에겐 신앙이며 누군가에겐 행복, 누군가에겐 충성이다. 누군가에겐 의무고 누군가에겐 공리이다. 일반적으로 본인의 신념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이는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는다.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신념을 내비친 대신 A를 옹호해주지 못했다. 나는 간을 쉽게 내어주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었나 보다.
이후로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 유난히 많이 마신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숙취가 너무 심했다. 나는 완전히 자기 통제력을 잃어있었다. 이 문화 속에서 반사회적으로 보였던 나는 사회 구성원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이송됐다. 선배 A에게 미안한 감정이 느껴진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A에게 언행에 대해 사과한 후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봤다. 어쩌면 나를 통제할 권한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사회에 양도하는 것일까.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애매했다. 나는 누가 통제하고 있을까? 개인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그냥 잠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난 술에 취했으니까. 그렇게 오히려 해방되었으니까. 인생은 술 취한 사람처럼 사는게 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고 싶은 거만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찾나 보다. 아무리 상사의 더러운 지시라도 일단 따르고 술로 잊나 보다. 그렇게 버텨내는 거구나.
이렇게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그러기 싫었다. 남는게 없을 것 같았다. 나의 삶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술 취한 사람은 자기 통제력을 갖는가? 사회에 취한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51 대 49이다. 자아와 사회생활의 비율이다. 힐링캠프에 대한 회장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대답에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있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되 매 순간 비판적으로 사고한다. 서로 기분 좋을 정도로.. 나는 이에 대한 교훈과 실전경험만을 남긴 채 돌아왔다.
나는 51% 정도 취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