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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왜 우리는 한 번뿐이며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이 인생은 그리 하지 않는가

by 현규

삶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보면 불현듯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삶을 이루는 경험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마련이다. 경험을 대하는 태도는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며 목적이자 과정 그 자체이다. 우리는 또 어디에 경험을 두고 왔는가. 놓친 삶은 어디에 있는가. 조남호 작가님의 공허의 시대 충만주의 파트를 읽다보니 프랑스에서 루브르 박물관에 들렀을 때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성인이 되고 스스로 길게 떠나는 첫 여행이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얻어와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목표가 있었고 어쩌면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 2일차인가 3일차에 들렀던 것 같고 그때쯤 바쁜 스케줄에 약간 지쳐있었다. 그러나 하루쯤 푹 쉬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는 생각은 여기 오기 위해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아까워서라도 모나리자는 꼭 봐야했고 혹시나 발견할지 모를 인생 작품을 찾아 여행을 떠나야했다. 결국 모나리자도 보았고 인생 작품까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몇 작품들도 건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갔던 루브르는 박물관이라는 전체적인 시퀀스를 몸으로 느끼며 여러 감정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또한 그 경험을 온전히 느껴냈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는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고민하고 있는 나로 돌아오자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왜 우리는 비싼 돈을 주고 온 음식점이나, 시간을 들여 간 외국여행,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에선 모든 경험, 순간들을 다 느끼려 노력하면서 왜 한 번뿐이며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이 인생은 그리 하지 않는가? ”

가끔 삶이 대충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시간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 같고 밥을 먹더라도 똑같은 밥을 항상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똑같은 하루를 마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다보면 이 지루한 삶을 채워줄 다른 여행이나 색다른 경험을 계획하곤 한다. 이미 우린 미술관에 들어와 있는데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미술관에선 계속 같은 그림, 비슷한 그림이 나와도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한다. 변기가 놓여있거나 벽에 바나나가 붙어있어도, 공장에서 찍어나온 듯한 엔디워홀의 작품이 반복되어도 어떻게든 그 경험을 느끼려 한다.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그 경험으로 어떻게든 충만해져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야를 넓히고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삶도 거대한 현대미술관과 같다. 전성기와 같은 명작들도 더러 있겠지만 반복되고 일상적이고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있는 미술관이다. 심지어 명소라도 되는 듯 입장하기 굉장히 어렵고 한번 모든 작품을 보고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 단언컨대 인생에 두 번 없는 기회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그림들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한다.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 사진도 많이 찍고 다양한 경험으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명소에 왔기 때문이다.

만약 루브르에서 같은 작품이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한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다르게 느껴 보려할 것이다. 몰입할 것이며 고민할 것이다. 지루함보단 그간 지나왔던 그림들의 배치를 토대로 작품 간의 창조적 연결을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는 현재 마주한 그 작품을 완전히 경험하려 노력할 것이다. 유튜브를 보거나 새로운 것을 찾지 않는다. 명소의 경험을 오롯이, 오래 간직해야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난 침대에서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오래 간직하자. 매일 보는 친구들, 매일 걷는 길이나 때마다 먹는 끼니, 모든 순간에 경험을 놓치지 말자. 지루해도 놓칠 수 없는 것들이니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경험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단언컨데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이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삶의 경험들을 온전히 살아냈을 때, 인생이라는 미술관에 방문한 그 경험은 오롯이 스스로의 것이 될 것이며 돌아보면 분명 뿌듯한 삶으로 기억될 것이다. 왜 우리는 한 번뿐이며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이 인생은 그리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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