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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문

아름다운 배우, 관객 그리고 희곡

by 현규

“겨울 냄새와 차창의 불빛이 스쳐가는 아련한 사랑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国)’에 대한 소감을 불빛 속에 적어넣으니 눈이 감겨왔다. 문득 차창의 불빛처럼 암막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밖의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춤을 추고 촉촉한 비와 비에 반사된 빛이 눈동자를 보듬는 느낌이 든 새벽의 어느 시간, 그제서야 ‘나’로 살고 싶어진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지난 1년 전 마지막으로 글을 쓴 이후 앞으로 더 많은 글을 써내겠다 다짐하였으나 나의 펜 끝은 줄곧 다른 곳을 향했다. 간호학과인 나는 중증의 허리디스크를 앓아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하게 되었고 줄곧 신청을 해왔다. 허나 그 신청은 몇 년간 반려되었고 나는 매번 계획을 1년씩 미루어야했다. 이왕이면 좀 더 넓은 동네로 주소를 옮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단지 생각뿐이었고 마땅한 전략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끝에 나는 대학을 3학년까지 마치게 되었다. 간호학과 남학생은 으레 4학년 시기에 전역자, 기졸자 신분에서 보통 취준을 하게 되는터라 4학년이 되기 전에는 입대해야했고 전역해야했다. 그런 처지의 인물이 아직 커튼을 붙잡고 있자 객석에선 입대는 언제하냐는 질문이 박수갈채처럼 쏟아졌고 나의 정체성은 ‘아직 입대 안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만약 한 번 더 입대가 미뤄진다면 그땐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리라라고 뮤지컬 배우처럼 어렴풋이 생각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하는 독백은 홀로 하는 것이지만 방백이나 다름없다. 무대 위에서 외치는 모든 대사는 관중의 입 위에서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기대하는 삶의 궤적 안에서 살아왔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는 법을 가장 어려워한다. 관객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고 무대 감독님이나 여타의 스태프들의 시선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음속엔 수평으로 지나던 시간 선을 한번 비틀고 싶었고 그렇게 어떠한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쩌면 그 의지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국 1년의 거대한 자유를 얻었다. 병무청에게서 얻음 당한 것이기 때문에 수동태로 문장을 마무리했어야하나 여기서 나는 무의식 속 의지를 느꼈기에 얻었다고 말한 것이다. 극단을 뛰쳐나온 배우가 보는 하늘은 이렇게 맑았으려나 그럼에도 웬지 허전했으려나. 주변인들에겐 그렇게 말했다. ‘나 진짜 큰일났어, 또 1년 미뤄졌네, 나 몇 학번이랑 졸업 하는거야?’ 배우로서 마지막 대사를 뱉은 것이었다. 거대한 자유의 힘을 빌렸으나 그냥 내가 한 해 하던 거 하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잘 떼어지지 않았다.


모든 일은 나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며 무슨 일을 하던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든 앞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그리고 앞의 인생이 아닌 그 순간 어쩌면 내 삶의 이유이었을지도 모를 오늘을 양껏 느낄 수 있다는 신념은 지금까지 내 삶의 대주제이자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문과였던 내가 이과로 재수하도록 했고 학창 시절 무대 위에 오르는 친구들을 부러워만 했던 이방인을 무대 위에 올렸고 학생회에 들지 못해 낙담한 고등학생을 학생회로 이끌었으며 간호학과로, 축구장으로, 헬스장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거대한 자유의 그늘아래,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나의 음악, 정규 1집 앨범을 발매하였고 코딩에 코자도 모르던 내가 부트캠프를 다니며 웹사이트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주 5일 이상 운동을 한주도 빠지지 않았고 기술 블로그 포스팅도, 1일 1 코딩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2개 기사 시험 필기에 합격하여 실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 다른 2개의 자격증을 한 번에 준비하면서 선형대수학과 미적분학을 공부하고 있다. 올 한해 그 순간순간에 감동을 느끼고 마음이 충만하여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곤 했다. 몰입하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열어둔 터라 공기는 차고 비 내음은 여전히 부드러우나 양옆으로 펼쳐진 원고처럼 부담스럽고 어딘가 마음이 저리다. 이 저릿한 감각이 나를 10달의 과거에서 나를 노트북 앞으로 다시 앉힌다. 공허한 것인가. 원근법에서 오는 무감동 같다. 조직되고 짜여진 언어와 표현, 그래보이는 삶에서 오는 갈망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는 법을 가장 어려워한다. 사람들은 올해 내가 한 일들을 들으면 ‘간호학관데 그거 해서 뭐하게’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나중에 간호정보학 하려구요’, ‘개발자하려구요’, 아니다. 사실 난 그냥 재밌어서, 세계여행하는 것처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서 그냥 하는 거다. 목적은 하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일 뿐 한번도 그것이 나의 1순위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왜인지 목적을 가져야할 것 같이 느껴져 그들에게 통념적인 대사를 내뱉는다. ‘나중에 간호정보학 하려구요’, ‘개발자하려구요’

어느새 난 다시 무대 위에 올라와 있다.


가끔 생각해보면 사랑은 연극 같다.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이성적이어야하고 솔직해야하면서도 때로는 말을 돌려야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치열하고 비로소 나로 하여금 본질에 앞선 실존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후회가 없고 아련한가보다. 어두운 방에 빗소리를 뚫고 작게 틀어놓았던 클래식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자꾸만 무대에 올라야하는 현대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자꾸 거짓된 삶은 사는 것 같고 끌려다니는 것 같아 자책했다. 물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일 수도 있다. 어딘가에 입장을 밝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각만 많아질 것 같다. 하여 나는 결국 여기까지 왔다. 노트북 앞에 앉아 클래식 선율의 힘을 빌려 글을 써내려간다. 생각을 생각으로 이길 수 없기에 나는 행동으로 머릿속의 극장에서 벗어난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는 법을 가장 어려워하지만 삶의 무대에서 에드리브를 해보려한다.


입장문

나는 꾸준한 삶,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창조하는 삶에서 감동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올해 나는 외진 설국으로 떠나왔지만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알 수 없기에 아련하고 낭만적이다. 답이 없는 외침은 밤공기를 타고 정신과 얽힌다. 다시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지만 왜인지 모르게 후련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겨울 냄새가 느껴지는 듯 그새 차진 밤공기를 따스한 불빛이 어루만진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선언과 밤은 그대로 마음 안에 녹아든다. 아름다운 배우, 관객 그리고 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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