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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규 Mar 26. 2023

두 가지 슬픔

세상을 멀리서 보는 법

 최근 나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집에서 나올 때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했다. 들고 나와야했던 짐 가방, 입어야 했던 외투, 피부 관리를 위해 발라야했던 스킨의 무게까지 모두 외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됐다. 약속 장소로 향한 나의 몸은 하루 살이를 위해 최대한 많은 고철을 주워 담은 지게꾼처럼 앞으로 휘어졌고 자연스레 시선은 아래로, 팔음 몸쪽으로 움크렸다. 


 우울함이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공기의 차가움처럼 갑자기 스며든다. 역시 환절기인 것인가 싶으면서도 불어오는 바람과 이전의 날씨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이 밉다.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마찰, 미성숙한 상사에 대한 안타까움은 모두 나의 면역력을 떨어뜨렸다.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의 성벽이 무너질 때 자기 혐오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는 것인데 결국 주변의 모든 잘못은 나의 잘못이 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졌을 때 이런 감정이었을까? 인간의 모든 잘못을 대변하는 일은 고도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현자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아직은 덜 성숙한 나로서는 이에 대해 억울함을 느낀다. 어쩌면 신분 차이가 있음에도 사랑하려는 두 연인보다 이성과 감정 사이의 마찰이 심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살아온 궤적이 다르기 때문에 얼굴도, 성격도, 잘하는 것들도 다 다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주장은 적어도 각자 개인의 우주에선 설득력을 가지며 어떠한 주장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비로소 정답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충분한 공감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며 서로의 우주를 이해한다.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진 자는 설령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다른 능력을 믿기에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 존중해주고 조직의 존치를 위해 자신을 굽힐 줄 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것에 집중하고 부딪힌 난관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여 타인을 설득한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그 당시 슬펐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모든 상황을 알고 타인을 이해했지만 존중하기 위해 참아야한다는 데에 억울함을 느껴 화를 낸 나에 대한 원망이었고 둘째는 하필이면 내가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달랐던 것에 대한 분노였다. 이성은 현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순간의 감정은 슬픔과 우울을 표출하려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강압적으로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첫 번째 사실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칸트의 정언명령 2번 “너의 행동이 보편적 도덕원리의 준칙이 되도록 하라”는 인간의 성숙도에 따라 같은 법이나 규칙이라도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있기에 명령을 지키려는 사람을 충분히 설득하기에 역부족이다. 내가 그랬듯 준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이를 지키지 않으면서 세상을 잘 살아가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준법자는 도덕원리를 준수하는 자신에 대해 현기증이 나고 안전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 고층에서 몸을 던져 스릴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화가 나는 것 또한 당연한데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욕망의 표출이 화의 형태가 되는 것도 당연한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부정적 감정을 폭발시켜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경향들은 사람이 이성보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극대화되기에 이는 자연법정에서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기본원리이며 어쩔 수 없는 무엇이기에 도덕 원리 아래 중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그 누구에게도 책임의 소지가 없다.


 하루는 24시간이다. 이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스스로가 자전하고 있으며 또 달이 지구를 공전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일인데 아무도 이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법칙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사람들은 수능과 같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도 하루가 24시간인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내가 겪었던 첫 번째 슬픔이 안타까운 이유는 위 사실들에 근거한다.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영역, 어쩌면 신의 영역이자 인간 누구에게도 책임의 소지가 없는 영역들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한다면 그것은 자연법칙의 권능에 도전하고자하는 인간의 오만일 것이다. 그렇기에 도덕법칙을 나만 지킨다는 데에서 오는 억울함 그 자체, 그것이 화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한 과정에서 화가 났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진심으로’ 미워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를 인정했을 때 과거의 행동을 용서하고 스스로를 이해해 줄 수 있다.



 두 번째 슬픔이 안타까운 이유는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이를 안타깝다 생각하기 위해 ‘인간은 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힘들까?’, ‘애초에 화가 안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왜 이것들에 대해 고민한 더 성숙한 인간이 미성숙한 인간의 슬픔까지 떠안아야 할까?’ 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답을 찾아야 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모두 다르고 때문에 그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다투지 않기 위해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세운 윤리 즉 규칙이다. 때문에 위와 같은 규칙을 지키면 그 사람은 좀 더 나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더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런 당연한 법칙을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 되기도 한다.


 한 사건이 있었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와 생각이 너무 다른 상사가 있었다. 그는 나를 배척하고 많은 일을 처리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나를 비난했다. 본인에 의견에 너무 많은 반기를 든 것, 그 방식이 온화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더 성숙한 상사였다면 이를 전달하는 방식도 온화했으리라. 본인은 그런 것을 원했음에도 정작 스스로는 그러지 못했다. 정색했다. 그리고 그 또한 진심으로 화나있었다.


 위와 같은 상황은 앞서 말한 당연한 법칙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조금 무리가 있다. 왜 이런 상황들로 힘들어했을까. 불교에서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으로 간주했으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봐야 희극이라 했다. 상황에서 좀 물러나서 상황을 보자. 저 상황은 당연한 법칙을 받아들이기에 상당히 디테일한 상황이다. 여러 분노의 요소들이 체인처럼 얽혀있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 인간은 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힘들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모두 다양하지만 동시에 비슷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바뀌면 나와 같아질 것 같기에 설득하려 한다. 집착하고 한 곳에 몰두한 이상 경주마처럼 한 곳으로 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위의 상황은 서로가 집착한 상황이자 사태가 디테일해져 강박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상사는 본인의 일과 성과에만 집착하여 동료의 열망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 상황 자체에 너무 집착하여 화를 키웠다. 서로가 너무 본인의 일에만 집중한 나머지 화를 내고, 불만을 갖는 실수를 범했다. 


 애초에 화가 안날 수는 없을까?, 성숙한 인간이 미성숙한 이의 슬픔까지 떠안아야할까? 그 답은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었다. 잠깐의 화는 물론 날 수 있다. 이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화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불교는 무집착은 초연함이 아니라 온전히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 사람의 실존 자체를 사랑하는 것, 마치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부모님의 시선으로 세상사를 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아이들끼리 다툴 수 있고 나를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모든 것을 이와 같이 보는 삶의 방식이 중요함을 장고 끝에 알았다.


 미성숙한 이의 슬픔은 어떻게 떠안을까. 이도 마찬가지이다. 떠안지 않아도 된다. 그냥 흘려보내면 된다. 모든 일을 사사롭다고 생각하고 흘려보내는 일 빠르게 시선을 돌리는 연습을 우리는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돌아보자, 나의 두 번째 슬픔 역시 안타까운 것이었다.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이제 조금은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모든 사건 사고들에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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