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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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코로나 시대가 열렸다. 바이러스는 국경, 인종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퍼져나갔다.
여자가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급격한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었다. 만약 치앙마이에 더 머물렀다면 태국에서 발이 묶일 뻔했다. 태국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외국인 입국금지, 전 국민 자택 대기, 지역 간 이동 금지,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한국도 모든 입국자 14일 강제 자가격리를 하는 팬데믹 선언 시대, 코로나 블루가 일상을 잠식하는 세상이었다.
지구상에서 처음 겪는 코로나 시대에도 봄은 오고 꽃이 피었다. 심지어 1922년 이래 벚꽃 개화가 가장 이르다고 한다.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 유난히 개화가 빨랐으나 봄꽃 거리두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실시되어 꽃은 저 혼자 피었다 시들었다.
여자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 이상한 증세에 시달렸다. 멀미 증세와 비슷한 두통과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매스꺼움이 종일 지속되었다. 입덧과 흡사해서 임신테스트를 했다. 음성이었다. 코로나 검사도 해봤지만 아니었다.
입덧은 어느 시기가 되면 없어지는데 여자의 증상은 차도가 없었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이라는 기간을 정해놓고 계약 데이트를 했던 남자. 여자가 한국에 돌아오고 한 달 뒤에 남자도 한국 본사로 돌아왔다. 여자의 전화번호를 모르는 남자는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보고 싶어요. 만날 수 있을까요?"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자의 숨이 잠깐 멈췄다. 후우, 숨을 깊게 내쉬고 약속 장소를 잡았다. 한 달 만에 만난 남자, 얼굴이 까칠하니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치앙마이에서 처음 만났을 때 누구와 닮았는지 그렇게 생각이 안 나더니 한 달 만에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마자 떠올랐다. 여자가 좋아하는 중국 배우, 양조위. 무엇보다 양조위와 닮은 슬픈 눈빛과 왜소한 체형으로 인해 더 닮아 보였다. 그날 남자의 눈빛은 양조위의 눈빛보다 더 깊었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나 슬픔이 배어있었다.
"제가 좀 이상했어요. 쌤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건데... 그 사실이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한국에 오면 쌤에게 연락을 하게 될까 두려웠어요. 연락을 하면 안 된다고, 쌤을 만나면 안 된다고 세뇌를 했어요.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는데... 보고 싶었어요."
태국에서 정해진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계약 데이트를 한 것이 무색하게 여자는 남자의 말에 무너졌다. 여자 역시 남자가 보고 싶었다. 같이 보낸 3번의 주말여행을 평생 추억하면서 살아야지. 다시는 만나면 안 돼. 소용없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도 해도 생각이 났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보고 싶었다. 동시에 입덧 증세가 기승을 부렸다.
여자와 남자는 태국에서 한 달간 계약 데이트를 하는 동안 서로를 쌤이라 불렀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로를 '당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자의 입덧과 흡사한 증상은 남자를 다시 만나자 사라졌다. 여자는 그 증상을 '연애 입덧'이라고 이름 붙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상을 덮쳤고 코로나 시대의 사랑 또한 여자와 남자를 덮쳤다. 여자는 남자에게 갔다. 남자도 여자에게 왔다. 서로에게 가고 왔다. 마스크를 쓰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마스크 때문에 대담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어떤 날은 사람들이 많은 재래시장에서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오늘 뽀뽀 100번 하기로 했잖아요. 만약 시장에서 뽀뽀하면 뽀뽀 한 번에 10번을 제해줄게요."
여자의 제안에 남자는 양 옆을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마스크를 내리고 여자에게 두 번 입 맞췄다.
"2번 했으니까 20번 제하는 겁니다, "
마스크를 올리며 말하는 남자의 눈은 여자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시장 구경을 나오기 전에 내기를 했는데 남자가 졌고 벌칙이 뽀뽀 100번이었다. 여자의 장난기가 발동해서 해본 말인데 남자가 덥석 물더니 시장 한복판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2번이나 입맞춤을 했다. 몇 달 전의 남자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여자는 남자와 손을 잡고 걷는 걸 좋아한다. 남자의 손을 잡으면 포개지는 지점에서 완벽하게 아귀가 맞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완전체의 느낌은 애정 표현으로 나타나서 길거리, 전철에서도 입을 맞췄다. 물론 사람들이 없거나 안 볼 때 입을 맞추긴 했지만 남자는 기겁을 했다. 그랬던 남자가 이제는 사람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2번이나 뽀뽀를 한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변화가 사랑스러웠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 역시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행동이다. 남자와 함께 있으면 지나칠 정도로 입을 맞추고 서로를 만지고 안았다. 지나칠수록 좋았다. 남자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여기서 뽀뽀하면 1번에 20번 제해줄게요."
남자는 진짜요? 하면서 마스크를 내리며 다가왔다. 여자는 마스크를 내리지 못하게 막으면서 웃음이 터져서 말이 끊겼다.
"나랑... 뽀뽀하기가... 그렇게 싫어요? 20번... 제해 준다니까 막... 달려드네."
여자가 허리를 잡고 웃어대면서 말을 하느라 마스크가 부풀어 올랐다 내려갔다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도 웃음이 터져서 말이 끊겨 나왔다.
"아니, 당신이 돌아가기 전에... 뽀뽀 100번... 채우기 힘들 것 같으니까..."
코로나로 세상이 전염되고 있는 그때 여자와 남자는 길가에서 웃고 있었다. 하도 웃어서 눈물이 났고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뽀뽀 100번을 채웠다. 유치한 유희가 행복했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남자는 보내기 싫다며 놔주지 않았다. 여자도 남자의 품 안에서 자고 싶었지만 돌아가야 했다. 남자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 돌아오는 길이 싫다고 했다. 여자의 반이라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여자를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 못 견디겠다고, 점점 견디기 힘들어진다고 했다. 여자는 남자를 안으며 말했다.
"당신이 '희망이 없다'라고 말했던 날 기억하죠? 그 말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서로 사랑하는데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한 마디에 다 들어있었어요. 당신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10년 뒤에 당신에게 가겠다고 말한 거예요. 아들이 성인이 되고 나면 남편에게도 말하고 당신에게 갈 결심을 한 거죠. 진심이었고 어려운 결정이었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떤 남편이 다른 남자에게 간다는 아내를 가만히 보고 있겠어요? 뭐라고 말할 건데요? 나는 당신과 살고 싶어요.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요. 나를 사랑한다면서 당신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10년 뒤요? 그때라고 당신이 달라지겠어요? 10년 뒤에 당신이 나한테 안 오면?"
"저는 분명히 10년 뒤에 당신에게 간다고 약속했어요. 당신도 기다리겠다고 했고 약속했어요. 약속한 지 3일밖에 안 지났는데 그사이에 마음이 변한 건가요?"
" 맞습니다. 10년을 기다렸는데 당신이 안 오면.... 혼자 늙어가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저는 혼자 있는 게 정말 싫어요. 10년이 지나서 당신이 온다는 말도 믿을 수 없고 당신이 진짜 나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나에게 오지 못하는지, 한 번뿐인 인생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를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는 거 알았잖아요? 그래서 한 달만 계약 데이트로 기한을 두고 그 후에는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다시 만났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제 상황을 다 이야기했어요. 오히려 당신은 태국 김 선생과 연락을 하면서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나요?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라는 것도 숨기고..."
"또 김 선생 이야기입니까? 김 선생과는 끝난 인연이라고 몇 번을 이야기합니까? 당신에게 마음이 다 가있는데 김 선생에게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 당신한테 미쳐서 당신과 지내고 있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니까 못 만나는 거지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만나겠지요. 저한테는 숨기고..."
"미치겠네... 김 선생은 사랑한 적이 없어요. 외로울 때 만났고 좋은 사람이어서 같이 늙어가자고 했어요. 김 선생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당신을 만난 거예요. 당신에게 끌렸고 사랑하게 되었어요. 당신을 사랑하는데 김 선생에 대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요."
"나는 처음부터 숨김없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어요. 당신도 그랬어야 했어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합니까? 김 선생과 끝났다고 이야기한 적도 거짓말을 한 적도 없어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왜 항상 김 선생 이야기로 새는지 모르겠어요. 조금 전까지 너무 좋았잖아요. 조울증 환자도 아니고 매번 극과 극을 오가니...'"
"말을 하지 않은 게 거짓말 보다 더 나빠요.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면서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숨기고... 처음에 만났을 때 이야기 했어야죠. 저는 솔직하게 다 이야기했고 당신을 만나서는 당신에게 온마음을 줬어요. 당신에게 부끄러운 짓은 한 적이 없어요."
"그럼 나는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겁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어떻게 할지보다 저를 더 비난하는 것 같네요. 당신에게 마음이 가있고 당신만 보인다는데 안 믿는 거죠? 당신은 당신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으면서 나한테만 요구하고 있는 거잖아요?"
"요구요? 내가 무슨 요구를 해요?"
"지금 당신이 나에게 하는 말은 결혼을 할 예정이라든가 솔로인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을 말입니다. 당신은 임자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에게 오지 않는다면서요?"
"그래서 10년 뒤에 간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을 한 지 3일 만에 당신이 약속을 깨고 있고요. 계산을 따져보니 손해 보는 것 같았나요? 김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태국으로 언제든 가서 합칠 수 있는데 10년을 저만 바라보다가 놓치기 싫으니까... 참 약았어요."
"또 그 소리, 김 선생과는 상관없이 제가 10년을 기다릴 자신이 없습니다. 저에게 약았다고 하는데 정말 제가 약았다면 당신과 이렇게 외롭고 힘든 사랑을 택했겠어요? 왜 자신의 사랑만 고귀하고 내 사랑은 싸구려 취급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10년 뒤에 당신에게 간다고 약속했고 당신이 그 약속을 깼다는 사실만 기억하세요. 저는 계산적인 사람이 못 돼서 당신처럼 앞뒤 재지 않아요.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만 사랑했어요."
'선택은 법적으로 효력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내 사람이라는... 우리 관계가 알려져서 비난받는 일이 생긴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당신과 같이 살고 싶어요. 당신이 내 아내였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나눠 갖기 싫어요."
"이미 당신을 선택했어요."
"그건 당신 마음이지 실제 법적 효력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이 나를 선택하지 못하면서 뭐가 그리 당당한가요?"
"처음부터 내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으면서 어떻게..."
"아니요, 저는 당신이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당신을 만나면서 내가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 악 또 그 소리,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우길 거예요. 나는 처음부터 속이는 것 없이 나에 대해서 다 말했는데 당신 혼자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까 당신에게 올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 사실 앞에서 왜 혼자 다른 생각을 해요? 사실을 사실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한 거겠죠? 불륜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 재수 없어."
"사과해요. 방금 한 말."
"재수 없다는 말? 아니, 당신 정말 재수 없어요. 재수 없어.'
남자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여자는 남자가 사라진 안방문을 노려보다가 여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부서져라 닫히는 소리가 남자의 귀에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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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어... 재수 없어...
남자는 여자가 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듣다니 믿을 수가 없다. 사랑하던 순간이 갑자기 싸움으로 변하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다 보니 여자가 조울증 환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널뛰기하는 감정에 맞출 수가 없다.
여자와 태국에서 한 달이라는 계약 데이트로 끝냈어야 했다. 그러기로 합의를 봤는데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여자가 보고 싶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만날 수밖에 없었다. 여자에게 미쳐있는 남자의 마음을 재수 없다고 하다니... 마치 전처가 흉악한 말로 악다구니를 쓰던 모습과 교차되었다.
여자가 10년 뒤에 남자에게 오겠다는 약속도 믿을 수 없다. 여자들은 다 똑같다. 여자의 말만 믿고 10년을 기다릴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가 없다. 여자는 오지 못한다. 여자를 치앙마이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혼자 한달살이를 하고 있었고 가정이 있는 사람이 혼자 있다는 것은 분명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봐도 혼자 외국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혼을 했거나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여자도 그럴 거라 짐작을 한 것이다. 한국에 와서 여자를 다시 만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이 여자에 대해 오해를 한 건 맞지만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여자가 소리를 치며 비난할 정도로?
재수 없어... 재수 없어...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여자의 비난도 지치고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지친다. 여자만큼 사랑한 사람도 없었다. 여자를 깊이 사랑하며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지만 김 선생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는 싸움이 잦았고 그때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도 여자가 처음이었다. 여자와 헤어지고 나면 남자는 세상 사는 재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무기력 상태가 지속되었다.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 여자를 다시 만나야 했다.
한국 본사로 귀환 후에 코로나 팬데믹이 발효되고 외국을 오고 가는 것이 막혀있던 터라 본사 근무 6개월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에 태국 주재원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원래는 본사 근무 3개월 후에 태국 법인 출장 3개월 나가는 식인데 코로나로 인해 태국으로 오고 가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니 아예 주재원으로 들어가라는 거였다.
남자는 이번 본사 귀환 후에는 주재원 승인 절차를 밟아 태국으로 돌아가 김 선생과 같이 지내기로 약속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여자를 다시 만났고 여자를 사랑하게 됐으니 태국 법인으로 갈 생각은커녕 코로나로 태국에 가지 못하게 된 상황에 감사하며 여자와 지냈다. 그러던 중에 주재원 제의를 받게 되었다. 태국에서 기다리는 김 선생이 떠올랐고 여자를 두고 태국에 갈 수 있을지 가늠해 봤다. 남자는 여자와 떨어져 지낼 자신이 없었다.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남자에게는 여자밖에 없었다. 주재원 제의를 거절하고 본사에 남았다. 대신 다른 직원이 태국 법인 주재원으로 발령받았다.
남자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기에 여자를 선택했다. 남자의 결정을 지켜본 여자는 이전보다 더 남자를 사랑했다. 남자는 사는 게 그렇게 재미있고 행복한지 여자를 만나서 알게 되었다. 그 여자가 내 여자가 아니라는 것만 빼고는 완벽했다. 그 여자가 남자에게 재수 없다고 했다.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일주일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여자도 남자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일주일을 더 버티다가 여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갈게요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혔다. 여자를 데려다줄 때 항상 내려주는 장소에 도착해서 다시 카톡을 보냈다.
-도착했어요
여자는 남자가 출발할 때 보낸 카톡도 확인하지 않았다. 읽지 않은 표시인 숫자 1만 선명했다.
-기다릴게요
저녁시간이라 전화도 하지 못하고 기다렸다. 카톡 표시는 여전히 1이었다. 남자는 전화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손은 이미 여자의 이름을 누르고 있었다. 통화음이 다 끝나도록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자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제 정말 끝인가?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는 맥주를 마셨다. 집에 있던 맥주가 바닥이 나자 양주를 마셨다. 집에 있는 술은 다 마셨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지 못했다. 숙취로 며칠을 고생했다.
여자에게 보낸 카톡은 여전히 1. 라인에 메시지 숫자가 떠서 봤더니 김 선생에게 여러 개의 문자가 와있었다. 여자를 찾아가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날 술에 취해 김 선생에게 라인을 보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남자가 김 선생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김 선생이 매일 어디서 퍼다 나르는 명언을 보내 안부를 전하면 가끔 답을 한 것 밖에 없다. 그날은 라인뿐만 아니라 영상통화까지 한 모양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김 선생이 걱정하는 문자를 여러 개 보낸 것을 확인하고 아차 싶었다. 잘 지낸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답장을 보냈다. 여자는 여전히 카톡을 확인하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여자를 만났다.
"어떻게 지냈어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난 듯한 표정과 꽉 다문 입술, 남자가 보고 싶어 하던 여자의 웃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 마음이 풀린다면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여자는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잘못한 게 뭔데요?"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했다.
"사실은 잘못한 게 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화가 났으니 뭔가 잘못을 하긴 한 거 같은데..."
남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과는 남자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재수 없다'는 말을 한 건 여자였고 남자는 그 말에 대한 사과를 여자에게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를 달래고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라서 무조건 잘못을 빌었던 것이다. 여자의 입가에 조소가 스쳐갔다.
"여전하네요.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 걸 보면."
"제가 알아야 되는 걸 알려주세요. 정말 몰라서 그래요."
여자는 테이블 위에 있는 물 잔을 들어 한숨에 마시고 남자를 쏘아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 제가 10년 뒤에 당신에게 간다고 한 말, 쉽게 한 말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고 약속을 지킬 거였어요. 제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입 밖으로 냈겠어요? 더구나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그런데 당신은 3일 뒤에 약속을 깼어요. 계산 속이 밝은 당신이 생각해 봤을 때 손해 보는 장사라고 생각이 되었겠죠. 약은 생각, 약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자꾸 약았다고 하시는데 저는 약게 살아보지도 않았고 약은 사람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다만 10년을 당신만 바라봤는데 당신이 안 오면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기는 싫습니다. 당신이 10년 뒤에 나에게 온다는 확신이 없어요."
"당신 스스로를 못 믿는 거겠죠. 1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릴 자신도, 10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여지를 남겨둔 김 선생을 놓치는 것도 아깝다는 게산 속이 발동했을 테니까요."
"왜 또 김 선생 이야기로 튑니까? 매번 김 선생 문제로 싸우는 건 소모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김 선생과는 끝난 인연이니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말아 주세요."
"김 선생이 문제가 아니에요. 나와 연인이 된 후에도 김 선생과 연락을 하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당신이 보인 태도가 문제인 거예요.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미래를 약속했을 텐데 사랑한 적이 없다. 특별할 것 없이 끝난 인연이라고 김 선생을 부정했어요. 언제든 상황에 따라 사람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 나 역시도 언제든 부정하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인 걸 알게 되었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사랑해 버렸는데 언제든 가시라고 하면서 그 부분은 마음을 접고 당신을 만난 거예요."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에요. 지나간 얘기, 싫다는 얘기를 그렇게 집요하게 되풀이하는 건... 김 선생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요.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싸우면서 시간 허비하는 거 어리석은 짓이에요. 나는 당신과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요."
"이번에도 당신은 똑같은 태도를 보였어요. 10년을 기다릴 자신도 없고 10년 동안 허비되거나 놓치게 될 다른 여지들에 대한 계산을 하느라 3일 만에 약속을 번복했잖아요.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뀐다고 당신 입으로 이야기했었죠. 언제든 등을 돌릴 사람,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어떻게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갈 수 있겠어요?"
"무슨 3일이에요. 3일 만에 제가 약속을 깼다고요? 그것보다는 시일이 걸렸을 겁니다."
"정확히 3일 후에 약속을 번복했어요. 제가 항상 메모하는 거 알고 계시죠? 수첩에 3일 후라고 적혀있어요. 며칠이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약속을 깼다는 것이 중요하죠. 언제든 등을 보이고 갈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 거니까요. 이제 신뢰는 전혀 없어요."
"신뢰가 없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사랑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신뢰가 전혀 없다니요? 나를 사랑하긴 하는 겁니까?"
"너무 사랑해서 문제죠. 언제든 등을 돌릴 사람, 언제든 나를 부정할 사람인 걸 알면서도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때는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은 당신을 전혀 신뢰하지 않아요. 앞으로 저에게 일이 생겨서 혼자가 되더라도 당신에게는 안 가요. 못 가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혼자가 돼도 나에게는 안 온다니, 지금 사람을 갖고 노는 겁니까? 나를 사랑한 적이 있기는 한가요? 나는 당신과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 왔는데 잘못 온 거 같네요. 저랑 헤어질 핑계 그만 대시고 편하게 사세요. 당분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 그렇게 견딜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관계를 정리하십시다. 당신 슬픈 얼굴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픕니다. 갈게요."
남자는 여자의 카톡과 전화를 차단했다. 코로나는 1차, 2차 유행을 거쳐 3차에 접어들었다. 4차 유행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는 염려가 변이 바이러스를 타고 확산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2.5단계로 격상되었고 남자와 여자의 거리 두기는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