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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4-코로나 시대의 사랑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4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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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핑크색 바탕에 꽃무늬가 들어간 앞치마를 둘렀다. 알몸에 앞치마만 입어서 등과 엉덩이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오랜 전에 본 영화 ‘베티블루’에서 베티가 알몸에 앞치마만 걸친 모습이 파격적이었다. 동시에 매혹적이어서 나중에 베티처럼 속에 아무것도 안 입고 앞치마를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남자를 만나고 실행에 옮겼다.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남자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 다 됐다. 앞치마를 입었지만 다 가리지 못한 젖무덤이 보이는 앞모습을 거울로 확인한다. 몸매가 그대로 보이는 뒤태도 거울에 비춰본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식탁에는 남자가 좋아하는 된장찌개와 잡채, 불고기, 버섯, 동태 전 등이 차려져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동시에 달려와 안기는 여자를 품에 안고 소리 내어 웃었다. 여자는 남자가 웃는 소리들 들으면 행복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안은 채 입을 맞추며 거실로 들어왔다. 남자의 품 안에서 빠져나온 여자가 뒤로 돌았다.

앞치마를 매듭진 사이로 여자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는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앞치마를 원피스처럼 입을 수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남자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빙그르 돌자 남자는 너무 예쁘다면서 여자를 안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여자는 앞치마를 입고 남자와 식사를 했다. 식사 중에도 눈이 마주치면 입을 맞췄다.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남자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면 여자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다! 너무 행복하다!

여자가 남자의 눈빛을 받으며 말했다. 양조위와 닮은 얼굴과 눈빛. 양조위와 함께 식사하고 있다니! 여자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영화 '베티블루'에는 알몸에 앞치마를 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베티처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게 당신이에요. 당신이라서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고마워요.”


남자는 여자를 안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치앙마이에서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을 이렇게도 좋아할 수가 있을까. 사람을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수도 있을까.


새해 첫날, 치앙마이, 파란 벤치가 있는 카페 앞에서 새해 첫 여명을 같이 본 남자, 그냥 그렇게 지나친 사람이었다. 이틀 뒤에 파란 벤치 카페를 찾았다. 여자는 기억한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자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남자, 반가운 기색이 눈빛과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났던 남자. 여자는 다소 놀랐다. 살짝 경계심이 일기도 했다.


여자가 남자를 기억하자 남자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같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이틀째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부터 문을 닫는 시간까지 꼼짝없이 여자를 기다렸다고 했다. 여자가 나타나자 남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누군지는 떠오르지 않았고 남자의 눈빛을 보자 더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누구와 닮았는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누구 닮았다는 말 못 들으셨나요? 닮은 사람이 있는데 생각이 안 나네요”

“아, 그런 소리를 듣긴 했는데... "

"누군데요?"

“닮았다고 하는데... 제 입으로 말하기가 좀...”

“문학적인 얼굴이라고 할까요? 작가 중에 누구를 닮은 건가? 암튼 문학적인 얼굴이세요.”


여자는 마주 앉은 남자의 얼굴에서 풍기는 문학적인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목소리 또한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한 달 살기는 언제까지 인가요?”

“1월 까지요.”

“저는 2일 뒤에 방콕으로 돌아갔다가 2월에 한국 본사로 귀환합니다.”

“휴가가 끝나가서 아쉽겠어요.”

“방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그 뒤로 한참을 여행과 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놀랍도록 대화가 잘 통했다. 문학적인 첫인상 그대로 지적인 사람이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고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여자가 흥미를 보이며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이 붙어 길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파란 벤치 카페에서 나와 타패게이트 근처에 있는 럿롯 식당으로 갔다. 가족들과 몇 번 가본 숯불갈비와 생선구이를 파는 곳인데 태국 로컬 식당 분위기와 숯향이 배어있는 갈비 맛이 일품인 곳이다. 식당에 도착하자 남자가 의외라고 말했다.


“식당을 이곳으로 정해서 놀랐어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지 않고 선술집 같은 곳으로 오셔서요.”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놀랐어요? 저는 여기 갈비도 맛있고 분위기도 딱 태국 느낌이라 좋아해요. 술도 같이 마실 수 있고 가성비도 끝내주죠.”


갈비와 엄청 큰 생선구이와 쏨땀을 주문하고 창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맥주병이 늘어나면서 남자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여자도 취기가 느껴졌지만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남자의 인생이 송두리째 여자에게 넘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을 거쳐간 여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첫 여자였던 전처, 별거 당시 만났던 연상녀, 태국에서 만난 김 선생까지,,, 마지막으로 어머니... 남자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전처와 포악한 싸움을 했던 시기와 별거를 거쳐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별거 당시, 동호회에서 만난 연상녀와 문자를 주고받은 것을 본 전처가 남자를 외도로 몰아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전처가 연상녀의 직장에 찾아가서 남자를 사랑하냐고 물었고 연상녀는 사랑한다고 답했다는데 남자는 연상녀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전처가 악다구니를 쓰며 남자에게 더럽다고 달려들었을 때 남자는 솔직하게 말했고 자신의 솔직함 때문에 자신은 원치 않는 이혼을 당했다고 했다.


“ 좋아해, 그분을 좋아해, 그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부인 앞에서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자신은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어법에서 남자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남자와 사는 동안 남자의 이기적인 어법 때문에 괴로웠을 전처에게 연민을 느꼈다.


남자는 별거로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연상녀가 잘해줬고 자신도 좋아했다, 좋아한 건 사실이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뿐이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한 죄밖에 없다고 했다.


별거 전에 이미 전처에게 다른 사람이 있었고 급기야 전처가 집을 나가버렸다. 남자는 술에 취하면 전처가 있는 집으로 찾아가곤 했다. 그날 전처가 남자의 휴대폰을 보게 되었고 더럽다면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폭언과 무식한 욕설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선후 관계없이 남자가 외도를 저지른 유책배우자가 된 것이다.


전처에게 다른 사람이 생겨서 집을 나간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이고 이후 별거로 이어지면서 남자가 연상녀를 만났고 좋아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처의 허물은 사라지고 남자가 연상녀와 주고받은 문자를 증거로 내보이는 이상 남자의 외도로 결론지어질 판이었다. 증거 앞에서 전처의 이혼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와 전세를 주고 있던 빌라를 부인 명의로 양도했다. 남자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남자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듯했다. 자신을 빈털터리로 만든 장본인, 남자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은 존재, 꿈에라도 나타날까 끔찍하다고 했다. 전처의 무식한 욕설과 소통 불능의 기억 때문에 이후에 만난 사람과는 나이와 상관없이 깍듯한 존댓말을 사용한다고 하는 남자. 어떤 일이 있어도 반말은 하지 않는다는 남자. 남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존대를 극진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술이 취해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 전처 이야기에 흥분했는지 눈이 충혈되고 술기운으로 발음이 조금 새어 나오긴 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좋았고 존대를 했다.


여자는 심리상담사라는 직업병인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심리분석을 하게 된다. 남자의 극존칭과 존대는 자신의 학력과 지적인 우위를 보여주는 지표로 작동하며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사회적 관계망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남자가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 지위는 자신이 명문대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석사 학위를 가진 지성인인 것, 현재의 직업으로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데 누군가 남자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거나 자신의 탓이라고 비난을 하면 존대어로 위장된 날카로운 말로 방어기제를 형성한다. 결과적으로 언쟁이나 싸움으로 번질 확률이 크다.


이혼과정에서 방어기제가 강력하게 작용하여 전처가 남자의 잘못을 추궁하자 창자가 드러날 정도로 싸우게 되었을 테고 자신의 솔직함 때문에 전처는 남자의 외도를 확정해 버렸고 재산을 다 뺏겼으니 모든 것은 상대방 탓이라는 게 남자의 공식이었다. 남자가 살아온 삶의 방식.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모든 일의 부정적인 결과는 남 탓이라고 치부하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남자는 이혼 후 2년을 산송장처럼 살다가 태국 법인으로 오면서 김 선생을 만났는데 잠깐 사귀었다고 했다. 가장 외로울 때 만난 사람이었고 나이는 어리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남자를 거쳐간 전처, 연상녀, 김 선생 이야기를 그날 다 들었다.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인생을 다 이야기하시는 편인가요?


"아닙니다. 제가 말이 많았죠.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 저도 모르게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럿롯 식당이 문 닫을 때까지 맥주를 마셨다. 여자는 그날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한다. 과거형으로 전해 들은 남자의 지나간 여자들, 당연히 인연이 끝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특히 김 선생과는 사귄 기간이 짧아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남자의 인생을 전해 들었다.

김 선생 때문에 죽도록 싸우게 되리라고는 전혀 몰랐던 그날... 그 죽일 놈의 연민이 여자의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될 줄 몰랐던 그날...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격 분석이 끝났고 삶의 방식도 파악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인복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제가 살아온 것을 돌이켜보면 인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자는 사람을 알고 싶을 때 이 질문을 한다. 인복이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 본을 보였기에 다른 이들도 그에게 좋은 사람으로 다가간다. 반면에 인복이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이 강할 뿐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주변 사람들도 좋게 대하지 않게 되므로 인복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이다.


남자의 대답으로 완벽하게 유형 분류가 끝났기에 더 이상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럿롯 식당에서 나왔다. 남자가 쏟아낸 어마어마한 양의 이야기를 마치 상담을 할 때처럼 장시간 집중해서 들어서 피곤하기도 했다. 지적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매력적인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인간실격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만약에 남자가 자신만만하고 진취적인 사람이었다면 여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상처투성이에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다. 혼자 남겨두고 나올 수없었다. 연약하고 위태로운 사람, 연민... 연민이라는 감정이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했고 그 순간은 진심으로 위로가 되길 바랐다.


남자는 치앙마이에서 남은 휴가 2일을 보내면서 여자에게 연락을 해왔다. 여자는 매번 다른 핑계를 대고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어야 했던 인연이 어떻게 이어졌을까? 여자가 분류한 인간 유형에서 실격한 사람인데 불구하고 남자를 선택할 수 있었던 감정, 그 감정이 코로나 시대 사랑을 여는 서막이 되었다.


방콕에 돌아간 남자는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왔다. 안부로 시작한 카톡은 통화로 이어졌고 매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을 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여자에게 끌렸고 만나고 싶다고 했다. 여자는 결혼한 몸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남자는 매일 전화를 했고 술을 마시고 전화한 날은 밤새 전화를 끊지 않기도 했다. 여자는 어느 순간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남자에게 전폭적인 애정공세를 받는 기분, 이 세상에서 여자만을 원하는 남자의 애타는 마음을 듣고 설렜다.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여자의 인간 유형에서 실격한 남자지만 남자와 대화의 시간이 늘어나고 남자의 마음이 전해지면서 여자의 연애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와 대시는 매일 이어졌다. 여자도 흔들렸고 남자에게 설득당했다. 여자가 치앙마이에 머무는 한 달 동안만 만나기로 합의를 봤다. 계약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코로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중국 우한에서 첫 확진자가 나왔고 한국에서도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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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현관문을 열자 여자가 달려와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남자는 여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뛰어오느라 숨이 가빴다. 누군가 자신을 집에서 기다려준 것이 언제던가? 가슴이 뻐근해졌다. 문을 열자 여자의 웃는 얼굴이 먼저 보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안길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눈웃음으로 가늘어진 눈매에 코 주변에는 자잘한 주름이 잡힌다. 눈과 코가 가운데로 모아지는 듯하면서 활짝 웃으면 마치 해바라기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 같다. 노란 웃음꽃이 가득한 해바라기를 품에 안았다. 남자는 여자를 안고 입을 맞추면서 거실로 들어갔다. 여자가 남자의 품에서 나와 빙그르 돈다. 여자는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맨 몸에 앞치마만 걸쳤다. 여자가 뒤로 돌자 등과 엉덩이 곡선이 그대로 보였다. 앞치마가 이렇게 섹시한 옷이었던가?


“당신 너무 섹시해요.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나에게 왔을까요?”


남자는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여자와 있으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 느낌이 들었다. 젊어지는 느낌이랄까. 생기가 돌고 기운이 솟구친다.


여자가 치앙마이에 있는 한 달 동안 여자와 계약 데이트를 했다. 한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 세 번의 주말을 같이 보냈고 한 달 뒤에 여자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떠난 후에 남자에게 밀려든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자는 자신이 있던 본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남자의 가슴이 왜 그리 아프고 찢어지는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생각만으로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떠나고 난 뒤에 생각보다 여자를 더 깊게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도 다음 달에 한국 본사로 귀환했다. 여자에게 연락을 하거나 만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남자의 윤리 기준에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서로를 위해 치앙마이에서 보낸 계약 기간으로 충분하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을 어느 정도로 보고 싶어 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되는 걸까. 상사병에 걸려서 죽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살고 싶었다. 여자를 만나야 살 것 같았다. 여자의 웃는 모습을 보면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결국 남자는 여자에게 연락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코로나 시대. 남자와 여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덕분에 어디서든 손을 잡고 다녔다. 누가 알아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자가 맨 몸에 앞치마를 입었던 날은 여자가 자고 가는 날이었다. 이렇게 섹시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것을 여자의 남편도 알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심통을 부리게 된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입었겠죠?”


여자는 처음이라고,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남자에게 입을 맞췄다. 남자의 심통이 키스 한 번에 사라졌다. 여자의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했으며 달콤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키스의 달콤함을 알게 되었다. 입속에서 느껴지는 혀의 놀림은 짜릿하고 달달했다.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누구와도 이런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를 더 깊게 안았다. 앞치마를 벗겼다. 여자의 나신이 드러났다. 남자는 아득해졌다. 여자가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당신 최고예요.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예요.”


남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되어 여자의 속으로 깊게 들어갔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쾌감이 남자에게 휘몰아쳤다. 여자와 포개진 상태로 누워서 숨을 골랐다. 남자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전처를 비롯해서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매번 사랑의 행위가 끝나면 아쉬워했다. 남자는 점차 위축이 되었고 상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강박 때문에 금방 끝났다. 병원에서는 정신적인 측면이 크다고 했다.


여자와는 첫날밤부터 달랐다. 여자와 같이 처음으로 여행 간 곳, 태국 북부 도시 람빵, 치앙마이에서 2시간여 거리에 있는 곳이다. 첫날밤에 야시장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시장을 빠져나가 다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두둥하고 거대한 달이 떠올랐다. 라차다피섹 다리 위에서 마주친 거대한 달, 대보름달보다 5배는 커 보였다. 그야말로 갑자기 두등하고 달이 나타났다. 비현실적인 달의 크기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치형의 하얀 다리 위에 떠있는 거대한 달.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심장 뛰는 소리 들리세요? 저렇게 큰 달은 처음 봐요.”


남자 역시 처음 보는 대형 달이었다. 여자는 얼굴이 상기되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달에 더 가까이 가보자고 했다. 다리를 건넜다, 달과 점점 가까워지자 여자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남자에게도 들렸다. 갑자기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앗, 저기... 저기... 강가에 달이 빠져있는 거 보여요?”


여자의 비명을 듣고 놀란 남자의 손을 잡고 여자가 뛰기 시작했다. 다리 끝까지 뛰어가서 강가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람빵 시내를 관통하는 왕강은 달을 품고 있었다. 왕강이 달에 물들었다. 강에 비친 달은 더 넓고 크게 둥그러졌다. 여자는 숨을 몰아쉬면서 강에 빠진 달을 바라보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 커졌다. 여자는 달에 홀려있었다. 무아도취 상태. 오직 달과 여자만 존재하는 듯 세상이 고요했다.


여자가 강으로 다가갔다. 달이 여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여자는 도취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달을 보고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여자가 앞으로 더 나아갔다. 남자가 여자를 잡았다. 여자는 몸을 떨고 있었다. 여자의 손을 잡고 다리 위로 올라왔다. 다리 중간에 있는 기둥까지 걸어갔다. 기둥에 여자를 기대앉게 하고 남자도 그 옆에 앉았다. 여자의 열기가 남자에게 전달되었다. 여자의 감정 또한 고양된 상태로 보였다. 남자는 여자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무엇이 여자를 급고양된 감정으로 만들었을까? 진짜 달 때문인가?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여 여자에게 주었다. 감정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자는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핑 돈다며 남자의 어깨에 기댔다. 남자와 여자의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저는 달을 보면 미친 듯이 울부짖고 싶어요. 심장이 뛰고 감정이 격정적으로 올라와요.”


남자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달을 달로만 봤지 이렇게 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옆에서 직접 보셨으니 그럴 만도 해요. 심장 뛰는 거 봤죠? 오늘처럼 큰 달은 다시 보기 힘들 거예요.”


‘그러게요, 저도 비현실적으로 달이 커서 놀라긴 했어요. “


라차다피섹 다리를 건너 야시장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방안에는 달빛이 들어차있었다. 여자는 창가에 서서 달을 바라봤다. 여전히 크고 둥글었지만 다리 위에서 마주친 달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달에 도취된 여자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남자는 먼저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 순간 방안에 스민 달빛에 눈이 부셨다. 달빛을 받고 서있는 여자의 나체가 드러났다. 달과 하나가 된 여자의 몸이 빛났다. 남자는 홀린 듯 여자에게 다가가서 여자를 안았다. 여자와 살이 닿는 순간 폭발하는 흥분이 온몸을 휘돌았다. 남자는 저돌적으로 여자에게 파고들었다,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와 등에 입을 맞췄다. 달의 정기를 받은 여자가 남자 위로 올라왔다. 달의 정령이 내려온 것 같은 격정적인 여자의 몸짓 속에 남자는 열락에 빠져들었다. 여자와의 첫날밤이었다. 거대한 달의 정기를 받은 여자의 몸을 안으며 완전체가 된 것 같은 만족감이 찾아왔다.


여자와는 완벽하게 궁합이 맞았다. 속궁합이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여자를 만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여자는 항상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 정말 잘해요. 너무 멋져요."


여자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못한다고 생각했고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강박 때문에 일찍 끝났다. 그런데 여자와는 오래도록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속궁합이 맞는 여자, 남자에게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여자, 심지어 말도 통하고 예쁜 여자, 그런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여자가 앞치마를 입고 남자 집에서 자고 간 날, 여자가 물었다.


"가장 슬픈 일이 뭐예요?"


남자는 여자가 자신에게 오기를 바랐다. 합법적인 내 여자가 되는 것, 여자는 가정을 절대 깰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이 남자를 가장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질문으로 갑자기 절망에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희망이 없다는 게 슬퍼요."


남자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여자는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채 침묵을 지키던 여자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10년 뒤에, 그때는 당신에게 갈게요. 아들이 성인이 되면... "


남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온다니, 10년 뒤면 어떤가. 여자와 같이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키스를 퍼부었고 약속을 했다. 10년 뒤에 우리 같이 살아요.


남자는 정확히 3일 뒤에 여자와 한 10년 뒤의 약속을 번복했다. 여자가 10년 뒤에 온다는 말만 믿고 여자만 바라보았는데 정작 10년이 지나서 여자가 오지 않으면,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10년 뒤에도 혼자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올 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조이도 있는데 여자만 바라보고 있다가 다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혼자 있는 게 죽기보다 싫고 여자와 같이 살고 싶지만 여자가 자신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여지를 열어놔야 했다.


말이 통하고 매력 있는 여자, 속궁합까지 맞는 여자, 그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남자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10년 뒤라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10년 뒤여서는 안 된다. 10년 뒤가 아니라 지금 와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에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남자의 약속 파기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가르는 변곡점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싸움이 남자와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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