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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3-코로나 시대의 사랑(초기)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3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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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3



"정확한 워딩을 말해줘요?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그 사람이 오면 지낼 곳이 없어서 같이 지내야 해요.”라고 했어요.


여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남자의 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자가 그 말을 할 때는 술을 마신 날도 아닌데 기억을 하지 못한다니, 그런 말을 할리가 없다니... 또 시작이다. 미친다, 정말!


보통은 술을 마신 날에 한 이야기를 기억 못 했는데, ‘김 선생이 한국에 오면 같이 지내야 한다’는 말은 멀쩡한 정신으로 여자와 산책을 하면서 했던 말이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남자가 여자를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씁쓸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저랑 만나다가 김 선생이 오면 같이 지내고 김 선생이 돌아가면 다시 저랑 만나서 같이 자고 그런다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의 속에서 열불이 올라오는 것도 모른 채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는 건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낼 거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을 접자고 다짐했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마음을 접기는커녕 남자가 한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 사람이 오면 지낼 곳이 없어서 같.이. 지.내.야. 해.요.”


그런데 남자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며 펄쩍 뛸 뿐만 아니라 여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말이고 자신과 헤어지기 위해 수를 쓰는 거 아니냐며 되려 여자에게 뒤집어씌우기 전술을 펼쳤다.


“내가 당신에게 온통 마음이 다 가있는데 그런 말을 할리가 없어요. 나하고 헤어질 명분을 만들고 싶어서 꾸며낸 이야기 아닌가요?”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는 상황, 여자는 적응이 안 된다. 이전에 이런 상황이나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사실을 부정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사실을 입증해서 밝혀내야 관계가 명확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싸움은 필연적이고 그 결과, 관계가 끝장나더라도 말이다.


여자는 가정이 있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남자가 ‘김 선생이 오면 같이 지내야 한다’는 말에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갈 수 없기에 언제든 다른 인연이 생기면 가라고 했었다. 그런데 여자를 만난 이후가 아닌, 여자를 만났을 때 이미 미래를 약속한 김 선생이 있었고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고 여자는 충격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였다.


여자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했고, 물론 남자는 그것 역시 몰랐다고 끝까지 부정하고 있지만, 여자는 남자를 만난 후에 남자에게만 마음을 주었다. 남자도 여자에게 마음을 다 주었다고 믿었다. 여자와 남자는 그야말로 치열하게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낼 거라는 말을 하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선언했다.


“당신이 분명히 말한 사실에 대해서 부정한다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합시다.”


남자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합시다. 다시 보지 맙시다.”


남자를 선택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다. 여자는 남자를 처음 만난 날이 먼 옛날 같이 느껴졌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났던 날, 싸움이 없었던 그 시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치앙마이 타페 게이트 앞은 풍등으로 가득 찼다. 제각각의 소원을 담은 풍등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여자의 가족들이 한국에 돌아가는 마지막 날이다. 여자의 친구가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위해 집을 빌렸는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오지 못하게 되었고 계약금과 한 달 치 집세가 날아갈 판이었다. 친구가 한 달간 치앙마이 집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하는 즉시 예정에도 없는 치앙마이로 가족여행을 오게 되었다.

호텔이 아닌 콘도에서 지내다 보니 평소와 다른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남편과 중학생 아들도 현지 밀착형 여행을 즐겼다. 크리스마스와 연말까지 어디서나 축제가 열렸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남편과 아들은 직장과 학원 때문에 먼저 돌아가야 했다. 이직을 고민하던 여자는 모처럼 생긴 여유시간을 치앙마이에서 보내기로 했다. 친정엄마 찬스가 있으니 집은 걱정 없지만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여자가 치앙마이에 남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남편과 아들이 일주일간 같이 지낸 집이라 익숙해진 공간에 있다는 것과 일주일간 치앙마이 구시가와 신도시 지리를 익힌 상태여서 그나마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마지막 날, 여자와 남편과 아들은 타페게이트에서 풍등을 날리며 소원을 빌었다. 전 세계의 여행객들이 풍등을 날리며 새해 카운드다운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소리가 타페케이트에 울렸다.


10-9-8-7-6-5-4- 3-2-1---------Happy New Year!


서로 껴안고 키스하는 사람들, 환호하는 사람들, 새해 덕담을 나누며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한데 모여 새해를 맞았다. 여자와 남편도 입을 맞췄다. 축제 영상을 찍던 아들이 여자와 남편이 입 맞추는 장면을 찍었다. 더없이 완벽한 새해였다. 풍등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며 하늘을 수놓았다. 풍등이 계속 떠올랐고 하늘을 가득 메웠다. 연말 축제와 풍등을 날리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그 물결을 헤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남편과 아들을 보내고 혼자 구시가지로 돌아왔다.


연말 축제가 끝나고 인파가 빠져나간 타페게이트 광장은 풍등이 타고 남은 재와 쓰레기가 날렸다. 하늘에는 아직도 타고 있는 풍등이 보였다. 묘한 긴장감이 여자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여자는 한 번도 혼자 지내본 적이 없었다. 여자 인생에서 처음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는 거국적인 날이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한 감정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구시가지를 느긋하게 걸었다. 몇 시간 후에 날이 밝으면 새벽에 문을 여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실 계획이었다.


언제 그 많은 인파가 있었는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리는 한산했고 문을 연 가게도 없었다. 이국적인 태국 글자는 거리 전시 작품처럼 멋진 풍경이 되었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일주일간 다녔던 길이라 익숙했다. 익숙한 길이지만 새해, 여자가 처음으로 혼자인 날 걷는 새로운 길이었다.


새벽 5시, 구시가를 걷던 여자는 오전 7시에 문을 여는 카페로 방향을 바꾸었다. 숙소와 가까워서 자주 갔던 카페였는데 커피 맛과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오래 걸어서 피곤했지만 생애 처음으로 갖게 된 혼자만의 시간, 그것도 새해 첫날, 잠을 자기는 아까웠다. 카페 앞 파란색 벤치에 앉아 새해 첫날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페이스톡이 울렸다. 아들이었다. 남편 얼굴도 비쳤다.


- 엄마, 이제 이륙할 거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래, 고맙다. 너도 복 많이 받아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잘 지내고 있어.

- 엄마, 끊어야 해요.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여자는 남편과 아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진짜 혼자구나. 여자도 모르는 고양된 감정이 비집고 나왔다.

아슴하게 새벽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페이스톡을 하느라 벤치 가까이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왜소한 몸을 가진 남자는 벤치에 앉아도 되냐는 듯이 여자를 바라보면서 손으로 벤치 쪽을 가리켰다. 여자는 여러 명이 앉아도 충분히 넓은 벤치였지만 끝으로 자리를 옮겨 공간을 넓게 만들었다. 남자가 벤치에 앉자 여자는 새해 인사를 건넸다.


"Happy New Year"


몇 시간 전에 타페게이트 광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했던 인사였다.

남자도 어색하게 웃으며 "Happy New Year"라고 답했다.

여명이 강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는 여명이 시작되는 곳을 향했다. 여명을 뚫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분이시죠?"


여자는 깜짝 놀랐다.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말을 하는 남자.


"아까 통화하시는 소리가 들려서 알았습니다."


'아, 네.... 그랬군요."


여자는 잠시 민망했다. 한국사람에게 'Happy New Year'라고 새해 인사를 건넸으니 말이다. 잠깐 민망하고 난 여자는 새해 첫날, 외국에서 처음 만난 한국 사람에게 한국말로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남자도 웃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돌려주었는데 여명에 눈이 시려서 그런 건지 여자를 보는 눈이 찡그려졌다. 얼굴을 찡그린 채 새해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모습이 우스웠다. 초면에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지만 숨길 수없는 웃음기가 벤 목소리로 여자가 물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네, 치앙마이에 오면 꼭 찾는 카페예요."


여자와 남자는 새해 첫날, 치앙마이에서 여명을 같이 보고 파란 벤치가 있는 카페 첫 손님이 되어 커피를 마셨다.





XY3



남자는 치앙마이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조이는 평소에 걷는 것을 싫어하고 산행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남자는 매연에 뒤덮인 방콕에서 사느라 산이 그리웠고 연초 휴가를 이용해 치앙마이에 머물면서 산행을 계획했다. 조이는 연말파티와 연초파티를 포기할 수 없다며 방콕에 남았다.


학원에서 김 선생으로 불리는 조이는 한국 문화에 심취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김 씨 성으로 바꾸고 자신을 김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외국인 학원생들은 조이를 ‘킴’으로 부르고 한국인들은 '김 선생님'이나 '김쌤'이라고 불렀다.

조이가 있는 학원은 방콕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고 외국인들에게 이름이 나있는 어학원이다. 조이의 강좌는 초급반이라 늘 인원이 많았고 미리 접수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 대기자 명단에 올려야 할 정도로 인기 있었다. 에너지 넘치고 젊고 예쁜 조이의 매력도 한 몫했다. 남자 역시 태국 법인에서 같이 일하는 선배에게 추천받아 가게 된 학원이었는데 조이가 무척 예쁘다는 말을 했었다.


남자가 처음 태국 법인으로 출장을 왔던 3개월은 업무 파악과 지독히 더운 태국의 날씨에 갈팡질팡하면서 보냈다.

이혼 후 도망치듯 택한 태국 생활이었다.

무미건조하게 3개월을 보냈다. 2번째 출장을 왔을 때는 현지 직원들과 소통을 위해서 태국어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학원에 등록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정신을 돌리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이혼 후 2년은 루저의 삶이었다. 한국에서 이혼한 남자, 가진 재산을 다 뺏긴 남자는 루저 그 자체였다. 이혼이 남긴 후유증은 인간관계를 가지치기하게 했고 모임과 활동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남자를 아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는 가급적 피했다. 자신을 루저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딜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지칠 대로 지칠 때쯤 태국 법인 출장 제의를 받았고 수락했다. 태국 법인에서 3개월, 한국본사에서 3개월씩 지내며 오가는 업무 형태였지만 한국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남자가 등록한 초급 태국어 반에는 남자 외에 한국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주재원으로 나와있는 그와는 초급반에서 중급반까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가까워졌다. 가끔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되었고 주재원 역시 이혼하고 태국 주재원으로 와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중급반 수업이 끝나고 주재원 친구와 독일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초급반 학생 몇 명이 들어왔다. 학원 바로 옆에 자리한 독일 펍이라 학원 사람들이 애용하는 장소였다. 초급반에서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네덜란드, 홍콩, 미국, 미얀마 등 다국적 인종들이 방콕에 있는 독일 펍에서 태국어를 섞어 쓰는 모습이 낯설고도 흥미롭게 보였다. 단연 태국인 부인을 둔 미국인이 태국어를 제일 잘했다. 말은 유창한데 글자를 몰라서 학원에 등록한 경우였고 부인의 가족들과 더 깊이 소통하고 싶어서 학원을 다닌다는 회사원이었다.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이 모여 어색한 발음과 성조로 태국어를 말하는 모습을 본 종업원들은 유난히 친절했다. 유창한 영어와 어설픈 태국어가 버무려진 그들의 대화와 술판은 유쾌하게 끝났다. 그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먼저 나가는 것과 동시에 김 선생과 중급반 땡모 선생이 입장했다. 펍 앞에서 왁자한 인사말이 오고 가더니 김 선생과 땡모선생이 펍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와 주재원을 발견한 김 선생과 땡모선생이 반갑게 인사를 보냈고 자연스럽게 합석을 했다.


김 선생은 외국인인 학원생들과는 영어로 대화하지만 한국 학생과는 한국어로 말했다. 전공이 한국학인 만큼 문장 구사에 어려움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6개월 갔었고 한국 친구들은 물론 한국 문화에 대해서 한국인 보다 더 잘 알고 팬심이 대단했다.


"중급반 재미있어요?",


남자와 주재원이 중급반 수업을 듣는 것을 알고 있는 김 선생이 물었다.


"싸눅, 사눅 막막 크랍."


주재원이 과장된 어조로 태국어가 너무 재미있다고 말하며 땡모 선생을 바라봤다.

김 선생과 땡모 선생이 동시에 웃었다. 조이는 최근 방영하는 한국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면서 남자 주인공이 너무 잘생겼고 멋지다며 주재원과 남자에게도 잘 생겼다고 했다. 한국 남자들은 다 잘생겼다고 말하는 김 선생의 말을 들으며 한국에서 온 루저, 두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태국에서는 자신들이 루저라는 사실을 깜빡하곤 했다.


김 선생과 땡모선생 덕분에 술자리가 무르익었고 금요일 밤의 여유가 겹쳐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라인 친구 추가를 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카톡을 사용하지만 태국은 라인을 사용했다. 라인 친구가 된 이후 남자는 김 선생에게 연락을 했다. 주말에 만나 데이트를 했고 무료한 남자의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남자는 태국에서 3개월을 보낸 후 한국 본사로 귀환하여 3개월 태국 법인 업무 지원팀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3개월 태국 법인에서 근무하는 패턴이 이어졌다. 3개월은 태국에서, 3개월은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조이와는 두 번째 출장 때 만난 거여서 실제 조이와 사귄 것은 6개월 남짓이었다. 횟수로 따지면 2년이었지만 남자가 3개월 단위로 태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만난 횟수는 많지 않았다.


남자는 김 선생과 둘만 있을 때는 '조이'라고 불렀다. 조이는 남자에게 '오빠'라고 했다. 이혼 후 2년간 루저로 살던 남자에게 조이는 이름 그대로 기쁨 그 자체였다. 조이는 늘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자신을 많이 사랑해 달라고 보챘다.


이혼이 남자에게 남긴 것은 무일푼과 여자에 대한 환멸이었다. 여자는 다 똑같다는 반감이 지나쳐서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조이가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참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남자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배려심이 깊었다. 남자가 38살, 조이가 30살이 되었을 때 남은 인생 같이 늙어가도 좋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이 역시 남자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번 3개월 태국 출장이 끝나고 한국 본사로 돌아가면 태국 법인 주재원으로 들어오기로 조이와 약속을 했다.


새해를 보내고 2월이면 한국 본사로 귀환한다. 주재원 승인 절차를 거쳐 다시 태국에 들어오는 시기가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조이와 함께 할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타국에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묘한 헛헛함이 차올랐다. 분명 조이는 이혼 후에 루저로 살았던 남자의 인생을 구제해 준 천사인데 이 무슨 호강에 겨운 생각인지 남자는 자신도 모를 감정에 머리를 흔들었다. 연초 휴가를 혼자서 보내기로 한 것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이혼 후에 혼자라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혼자 버려졌다는 생각이 루저로 이어졌다. 그런데 혼자만의 여행에서 알 수 없는 자유를 느끼는 자신을 보며 남자는 이게 뭐지 스스로에게 의아했다. 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조이 오빠 사랑해요. 오빠, 조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조이의 목소리를 털어냈다. 산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연말 축제가 끝난 타페게이트를 걸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풍등, 아직도 불꽃을 달고 하늘에 떠있는 풍등의 무리, 광장 바닥에 떨어진 풍등이 남긴 재와 쓰레기들...

황량한 풍경이었지만 묘한 안도감이 다가왔다. 새해, 새벽 거리, 남자는 치앙마이 구시가를 걸었다. 희미하게 여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파란 벤치가 있는 카페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새해 여명을 보고 싶었다.


파란 벤치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와있었다.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의 여자는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귀에 명확히 꽂힌 한국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남자의 가슴에 작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남자의 가슴에 계속 금이 갔다. 알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남자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작은 요동에 몸을 맡겼다.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가 반응하고 있었다.


여자가 통화를 끝냈을 때 남자는 벤치에 앉았다. 카페 오픈 시간은 아직 1시간이 남았고 근처에 문을 연 가게도 없어서 벤치에 앉아 새해 여명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곳에 여자가 있었고 여명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순간, 여자가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명의 기운이 여자를 에워싸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명의 강한 빛 속에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답을 하면서 여명에 휩싸인 여자의 얼굴이 눈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자가 웃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첫 만남이었다.


남자는 카페가 문을 열자 새해 첫 손님이 되어 여자와 안으로 들어갔다. 눈인사를 나누고 각자 다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셨다. 여자가 먼저 나갔다. 남자는 여자가 나간 문을 오래 바라봤다.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가슴에 계속 금을 그었다.


징... 지... 이... 잉... 지... 이... 찍... 지... 잉... 쩍...


남자는 금이 가는 소리에 붙들렸다. 가슴에 금이 가는 소리가 여자의 목소리와 합쳐졌다. 여명 속에서 빛나던 여자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새해 다음 날, 파란 벤치가 있는 카페가 문을 여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꼼짝 않고 카페에 있었다. 여자는 오지 않았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쳤으나 남자는 다음날도 카페에 나갔다. 1월 3일, 카페 마감을 1시간 앞둔 오후 4시경에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를 발견한 여자는 남자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저번에... 또 만났네요.”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도했다.


“네, 오셨군요.”


남자는 그날 밤늦도록 이야기를 풀어냈다. 남자가 살아온 인생 전부를.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씐 것처럼... 말이 쏟아졌다. 어느 부분에서는 눈물도 흘렸다. 여자는 신중하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남자는 여자가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 좋다. 여자를 떠올리면 항상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만난 치앙마이 새해 첫날, 여명이 강한 빛을 발할 때 여자의 웃는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눈부시게 빛나던 여자의 웃음이 사라지고 남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김 선생의 존재를 알고 난 후에는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금방 좋아죽다가 물어뜯을 듯이 비난을 쏟아냈다. 여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서 김 선생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여자만 생각하고 여자만 사랑하느라 김 선생은 안중에 없었다. 김 선생한테 미안하지만,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생각했다. 의무감, 도덕보다 감정을 더 중시한 결정이었다. 다만 주재원으로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서 남은 여생을 같이 보내기로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김 선생이 매일 보내는 명언에 아주 가끔 답장을 보내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걸 알게 된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의심하고 비난할 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여자를 따라 한국에 들어올 때 김 선생과 인연은 끝났다.


김 선생에게는 여자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태국과 한국들 오고 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서 김 선생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남자가 연락도 없이 한국에서 꼼짝을 하지 않으니 김 선생이 휴가를 받아 한국에 오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여자에게 말할 수도 없고... 걱정을 하긴 했다.


“그 사람이 오면 지낼 곳이 없어서 같이 지내야 해요.”


여자는 남자가 이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미치지 않고서 이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여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여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지나쳐 여자에게 자신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시점에서, 남자가 원하는 유일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는데 그 여자에게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인격이 바닥인 사람 취급 당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자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기억에 없다. 아니 그럴 말을 할리가 없다.


“내가 미쳤어요?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기억에 없어요.”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는 남자를 보고 여자는 더 이상 큰소리치지 않았다.


“당신이 분명히 말한 사실에 대해서 또 부정한다면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 그만해요.”


남자도 여자의 비난에 지쳤다. 왜 모든 잘못은 남자에게 있다는 말인가. 왜 기억에도 없는 말을 했다면서 비난하고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사랑만 고귀하고 남자의 사랑은 언제나 싸구려 취급이다. 인연이 끝난 김 선생 때문에 싸우는 것도 지쳤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만합시다. 다시 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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