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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2-당. 신. 에 대하여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2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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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2



'당신' 사건 이후 한 달이 지났을 때 남자가 여자에게 왔다. 여자는 야윈 남자의 얼굴이 가슴 아팠다. 여러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지만 이별은 적응이 안 되는 영역이다.


"어떻게 지냈어요?"


여자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 그냥.. 똑같죠... 뭐."


여자는 남자가 말 안 해도 어떻게 지냈을지 가늠이 되었다.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로 카톡과 전화를 여러 번 했고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도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여자도 남자의 카톡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헤어진 사람끼리 카톡으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을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미워할 수도 있는가. 사랑하는 감정과 미워하는 감정은 늘 붙어 다녔다.

남자가 다시 말을 바꿨다.


"사실, 아무것도 못했어요. 사는 게 재미없었어요. 당신이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여자가 건너편에 앉은 남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단골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이 평소와 달리 심각한 여자와 남자의 분위기에 곁눈질을 한다.


"우리 싸우지 말아요. 사랑하면서 살 시간도 부족한데 왜 자꾸 싸우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당신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데, 한 번뿐인 인생인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야죠."


타인의 시선에 예민한 남자답지 않게 말이 길어졌다.


이별 후의 재회는 그리움이 농축된 만큼 서로의 몸을 격렬하게 탐하게 된다. 서로의 몸에 자국을 남기고 알싸한 피로감과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깊이 포개져서 잠이 들었다.

여자는 이 순간과 공간에 대한 기시감으로 눈을 떴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왔을 때 와본 적이 있는 호텔이다. 대부분은 남자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이별 후에 재회를 하게 되면 남자가 여자에게 왔기 때문에 찾게 된 장소이다.


그러니까 '당신' 사건이 일어나기 전... 여자가 '당신'에 대해서 알게 된 곳이 이곳이었다. 그때도 크게 싸운 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이곳에 왔었고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부른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여자는 '당신' 사건의 전말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날, 여자는 궁금했다. 자신과 헤어진 이후에도 술에 취해서 카톡을 하거나 전화를 걸어왔던 남자. 그 남자의 마음에 대해서... 남자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여자는 그의 팔을 풀어냈다. 남자가 오히려 깊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에 힘이 들어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몸을 맡긴 채 잠시 기다렸다가 남자의 팔과 다리를 아주 천천히 공을 들여 풀어냈다. 여자는 남자의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여자와 헤어져 있는 동안 남자의 모든 기록들이 펼쳐졌다.

태국 김 선생과 연결된 라인을 먼저 열었다. 여자는 심장이 요동치고 손이 떨렸다.


사는 게 재미없어요... 술 좀 마셨는데...

왜 무슨 일 있어요?

그냥 재미가 없어요. 아무것도 못 하고... 당신...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어때요?


여자는 '당신'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남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다. 여자와 헤어져 있는 동안에 자신의 전 연인이었던 김 선생에게 연락한 것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와 헤어졌을 때마다 태국 김 선생에게 연락을 했다. 어떤 날은 여자와 헤어져 돌아서자마자 김 선생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술에 취해 말이 뭉개지는 와중에 여자에게 먼저 카톡을 보냈고 술에 취한 글자가 뚝뚝 끊기다가 다시 이어지다가를 반복하다가 여자의 무반응에 라인으로 옮겨갔다. 날짜와 시간을 보니 여자에게 카톡을 보내고 라인으로 김 선생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카톡과 라인을 왔다 갔다 했다.


여자는 호칭에 의미를 두는 편이라 호칭과 지칭을 정함에 있어 분명했다.


'당신'이라는 말 사용해 본 적 있어요? 누구와 그렇게 불렀던 적이 있어요?


아니요. '당신'이라고 불러본 적도 불린 적도 없어요.


진짜죠? 서로 한 번도 불렀거나 불린 적이 없는 호칭과 지칭을 사용하고 싶어요.


남자에게 '당신'이라는 지칭을 누구와도 나눠본 적이 없다는 확인을 하고 나서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이라고 불렀다. 남자도 여자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당신, 잘 잤어요? 당신, 보고 싶어요. 당신... 당신... 여자와 남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대방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깊은 행복을 느꼈다.


그런 '당신'을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다. 남자와 김 선생 사이에서 당신이라는 지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 후로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았고 전 연인이었던 김 선생만 매일 남자에게 어디에서 받았는지 모를 좋은 글귀를 보내며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여자는 온몸이 불덩이가 된 듯 뜨거웠고 핏줄과 힘줄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에게도 부르거나 불린 적이 없어 온전한 우리만의 상징적 지칭, 감히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다니 여자는 심장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화기를 느꼈다. 서로 '당신'이라고 부르기까지 보낸 시간이 스쳐갔다.


머릿속이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여자는 가슴을 쥐고 남자의 핸드폰을 침실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자리에서 무릎이 풀렸다. 숨이 안 쉬어졌다. 당신... 여자가 빠져나가 없는데도 여자를 안고 있는 모습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남자. 여자를 다시 만나고 세상 다 가진 바보처럼 웃으며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남자. 그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했다. 여자와 헤어져서 죽을 것 같다고 술에 취하면 연락을 해왔던 남자. 죽을 것 같다는 그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고야 말았다.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며 김 선생에게 연락을 한 것과 여자와 헤어져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동 시간대에 양쪽으로 문자를 한 것 중에 무엇이 더 여자의 숨을 막히게 하는지 가늠이 안 됐다.


숨이 안 쉬어져요. 숨... 쉴 수가 없어...


여자는 남자 위로 쓰러졌다. 남자가 침대의 요동에 눈을 떴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남자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여자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쥐어뜯었다. 남자가 여자의 심장을 마사지하고 여자의 몸을 비볐다. 여자는 금세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워했다. 얼굴은 핏줄이 떠질 듯이 팽창하여 시뻘겋게 변했고 호흡이 안 돼서 끅끅 소리를 냈다. 남자는 협탁 위의 핸드폰을 들었다.


119죠, 제 여자친구가 숨을 쉬기 힘들어해요. 빨리 와주세요.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왜 그래요? 당신... 왜 그래요?"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가 '당신'이라고 했다. 누구한테 당신이라고 한 거야? 지금 헷갈리는 거 아니지? 여자는 호흡이 곤란한 와중에 남자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소리만 들렸다. 남자의 놀람과 걱정이 껴안는 팔에서 느껴졌다. 여자는 놀란 목소리의 남자가 내뿜는 숨결이 여자에게로 옮겨오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숨결이 여자의 호흡에 닿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숨결이다. 숨이 느리게 쉬어졌다. 호흡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 여자는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한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었던 것은 여자가 남자를 만났을 때 이미 끝난 줄 알았던 김 선생과 여전히 인연의 여지를 놓지 않고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은 이중의 배신감이었지만 말이다.


남자가 여자를 안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요. 나와 있는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나는 당신만 바라보는데 왜 내 마음을 몰라줘요."


그날, 남자는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거기에는 남자가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불렀던 사실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통째로 부정당한 것 같았고 여자와 남자의 모든 시간을 부정당한 것 같아 참담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같이 보낸 시간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가 싶었는데 늦은 밤 길어진 통화 중에 여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한 적 없냐는 질문에 남자가 정색하고 부정하는 바람에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새벽에 택시를 타고 달려갔던 것인데, 마침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당신'이라고 불렀던 증거를 들이밀고 남자도 인정했는데... 사과는 없었다. 김 선생에게 당신이라고 한 것은 확인했지만 여자를 부르는 당신과는 다른 의미로 썼다는 말로 대신했다. 부정은 멈췄지만 말이 바뀌었다.


남자는 김 선생조차도 부정했다. 여자가 김 선생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남자가 김 선생과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인연의 여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남자가 말했다.


"김 선생을 사랑한 적 없어요. 가장 외로울 때 만났고 좋은 사람이라서 같이 나이 들어가자고 했어요."

"............................................................"

"당신에게 마음이 간 이후에는 만나지도 않았고 그쪽에서 매일 안부 연락이 와서 가끔 답을 한 게 다예요. "

".............................................................."

"사랑하는 마음이 두 마음일 수 있어요? 당신은 가능한지 몰라도 나는 양다리는 절대 못 해요."

".............................................................."


여자는 말문이 막혔다. 한 때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는데 사랑한 적이 없다니,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김 선생과 연락을 유지하고 김 선생이 보내는 사진에 예쁘다는 말을 해주는 남자가 양다리는 절대 못한다고 하는 말이 곧이 들릴 리가 없었다.

사랑한 적이 없다니! 그 말 때문에 신뢰가 완전히 부서졌다. 설사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더라도 한 때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을 부정하고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하는 남자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은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제든 사람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 상황에 따라 사랑을, 사람을 부정하는 사람.


신뢰는 박살 났다. 지금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김 선생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처럼 언제든 여자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남자는 여자를 부정할 것이고 남자와 여자의 시간도 부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향하는 감정을 버릴 수가 없다. 힘들게 선택한 사랑이고 끔찍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분명히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우리 시간을 부정하지 말아 주세요. 시간이 지나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우리 시간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해요."


남자도 분명하게 대답했었다.


"그럴게요.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여자는 그 말을 할 때의 남자 표정을 떠올렸다.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남자의 간절한 눈빛과 하늘에 있는 별을 따달라는 것만 빼고는 여자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며 김 선생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못한 것도, 연락을 계속해 오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여자가 원한다면 여자가 보는 앞에서 김 선생과 연락을 취하는 라인을 삭제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무릎을 꿇어본다며 자신의 사랑을 믿어달라고 했다.

신뢰는 부서졌지만 남자의 말은 믿었다. 진심인 걸 안다. 지금은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여자는' 당신 사건'의 전말을 복기하다 보니 119까지 부르며 소동을 피웠던 그날과 같은 공간, 같은 상황에 있다는 것이 씁쓸했다. 김 선생을 부정하고' 당신 사건'까지 겹치면서 여자는 남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남자와 헤어진 후에 신뢰가 없는 사랑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결론은 신뢰 없이도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사고의 반전이다. 사고의 영역보다 감정의 영역이 월등하게 우위에 있어서 생긴 병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감정이 모든 것을 잠재우진 못하지만 감정이 최우선인 것은 확실하다. 신뢰가 없이도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감정, 병적인 증상에 가까운 그 감정을 떠안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가 툭 던진 한마디는 감정에 균열을 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장 상처받을 사람이 김 선생인데 당신은 자신이 처한 상황은 안중에 없이..."


여자는 생각했다. 내가 처한 상황이라면... 내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말하는 거겠지.






XY2


남자는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달려와서 남자의 핸드폰에 찍혀있는 김 선생에게 '당신'이라고 부른 증거를 내보이고 돌아간 여자. 끝내 남자의 잘못을 확인시키고만 집요함. 남자를 박살내고 집에 돌아간 여자는 새벽에 집을 나갔던 이유를 남편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을 수도 있겠다. 남자는 여자에게 오라고 한 적이 없다. 여자가 쳐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 때문에 오해를 받고 죽일 놈이 되어버렸다. 그럴 정도의 일인지도 의문이다. 남자는 정말 기억에 없다. 맨 정신에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남자에게 '당신'은 오직 여자뿐이다. 어쩌자고 기억에도 없는 핸드폰에 찍혀있는 글자만으로 자신을 판단하는지, 남자에 대한 신뢰가 없는 여자가 밉다.

핸드폰에 정확하게 찍혀있는 증거로 인해 남자가 김 선생에게 당신이라고 부른 것은 확인했다. 기억에 없지만 증거 앞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부르는 당신과 같을 수가 없지 않은가. 술에 취한 상태로 김 선생을 여자로 착각하고 당신이라고 불렀다 치더라도 그건 여자를 부르는 '당신'과는 다른 의미일 텐데 그것을 몰라주는 여자가 원망스럽다.


"당신...이라고 했네요... 기억에는 없지만,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면 당신을 부르는 '당신'과는 다른 의미일 겁니다."


남자가 이 말을 했을 때 여자의 눈에 경련이 일었다. 곧이어 여자의 눈에 비친 포기를 읽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관계의 포기. 그리고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길에 남겨진 남자는 여자가 타고 간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봤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남자도 여자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여자와는 헤어지는 게 답이다. 몇 번의 이별을 통해서 여자 없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겁이 났다는 표현이 딱 맞다. 여자의 남편이 알아채고 일어날 일, 여자가 또 어떤 돌발적인 행동으로 남자를 공격할지 모를 일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앞뒤 분간 없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사람, 기어이 남자의 잘못을 밝혀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남편과의 뒷일은 생각 없이 새벽에 달려 나온 사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지만 내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이 생긴다면... 남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남자는 새벽 길거리에서 여자와 소리 높여 싸웠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찌푸려졌다. 가끔 지나가는 행인이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것도, 대화 내용을 듣는 것도 신경 쓰였지만 남자는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여자의 목소리를 누르고 같이 소리쳤다.


"당신 입장을 잘 모르나 본데요, 당신이 내 부인이면 당신이 요구하는 게 맞아요."


"내가 무슨 요구를 했나요? 김 선생과 연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연락하시라 했어요. 언제든 가시라고 했어요. 단 미리 이야기해 달라고 했죠."


"그래서 연락하고 지냈어요. 뭐가 문젠가요?"


"태국 그 분과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저를 만난 것이 드러났고 인연의 끝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만큼 신뢰도 무너졌기 때문에 언제든 가시라고 말했던 거예요."


"언제든 가라... 내가 김 선생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건 분명하죠. 당신이 기족이 있는 것처럼... 나는 느슨한 끈이었는데, 당신은 아주 단단한 끈이라는 걸 알았어요. 당신은 제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고... 저는 나쁜 사람이 되기는 싫은데... 당신을 너무 좋아하게 돼버린..."


"저는 처음부터 제 상황을 이야기했어요. 가정이 있는 걸 속이지도 않았고, 당신이야말로 속인 거 아닌가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단지 이야기를 안 했을 뿐이에요. 김 선생에 관해서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있는데... 당신밖에 안 보인다는 제 말은 안 믿지요?


"그런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했어요?


사실,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상처받을 사람은 김 선생이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의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남자에게 입장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고 있다. 자신은 남편과 같이 생활하고 남편과 한 침대에 들면서 남자가 김 선생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인가 말이다. 김 선생과 연락을 하는 것을 따지고 '당신'이라고 불렀다고 난리를 치려면 최소한 여자는 남편과 같이 살지 않아야 한다. 서로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아 생겨난 문제인데 자신이 유부녀인 것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여자가 남편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여자에게 소리쳤다. 여자도 소리 질렀다. 서로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았다.


여자가 김 선생의 존재를 알아챈 이후 자주 싸웠다. 좋은 분위기였다가 갑자기 김 선생 이야기로 빠지게 되면 언성이 놓아졌고 심하게 싸웠다. 술을 마셨을 때는 더 격한 말이 튀어나왔다. 눈에 콩깍지가 쓰인 연인들이 그렇듯 술을 마시면서도 서로에게 몸을 붙이고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대화는 또 얼마나 생기충전하고 달콤한지... 그러다 김 선생 이야기만 나오면 좀 전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여자는 사라지고 조울증 환자가 앞에 서있다.


"김 선생과는 끝났다고 했잖아요.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난 특별할 것 없는 인연이었다면서요?"


남자는 여자에게 김 선생에 대해서 말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사귄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김 선생도 언급했지만 여자를 만나고 난 뒤에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거나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것을 김 선생과 끝난 사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남자는 여자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답변을 했다.


"끝났다고 말 한 적 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짐작한 거지. 김 선생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 건 맞아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저는 적어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정말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김 선생이 좋은 사람, 정말 착한 사람인 건 알지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때 당신을 만난 거예요. 물론 나는 당신이 그런 견고한 틀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건 순전히 저의 오해였지만..."


여자는 기가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요? 진짜 이야기는 쏙 빼고 특별할 것 없는 인연이었다,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났다고 하면 당연히 끝난 인연이라고 생각하죠. 누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더구나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다서요?"


"김 선생은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만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에요. 외로운 사람끼리 같이 나이 들어가자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당신을 만나 너무 좋아하게 됐고 당신을 따라 한국에 들어와서 당신만 바라봤어요. 당신에게 온통 마음이 가버렸으니... 태국에 있는 김 선생도 눈치채지 않았겠어요? 미안한 마음에 가끔 답장을 한 게 다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을 만나고 난 후에는 김 선생을 만난 적도 없어요.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내 꺼이거 싶은 사람.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오지 않겠다고 했죠. 맞아요. 김 선생과 여지를 남겨놓은 거 맞습니다. 당신이 나한테 오지 않겠다는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남자는 여자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았다. 무슨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 했다. 그건 경멸의 눈빛이었다. 여자는 서늘한 눈빛을 쏘아대며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제 상황을 다 이야기했어요.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서 당신이 만나자는 제안을 처음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고... 당신은 그때도 김 선생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어야죠."


남자는 미쳐버릴 것 같다. 또 시작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힘겹다.


"저는 그동안 여러 번 변명이라고 해도 좋지만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걸 정말 싫어하고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듣는 걸 너무나 싫어합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아주 여러 번 설명했고, 당신의 말도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요. 저는 충분히 설명했고 더 다른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다니까요.

당신이 이해를 못 한다 해도 그건 제 영역은 아닌 것 같아요.

아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미리 얘기를 안 해서 당신이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제가 그 이유를 설명도 하고 제 마음도 얘기를 했는데도 이해를 할 수 없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쳐요. 그래서 지금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래요, 제가 생각이 짧아서, 굳이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제가 정말 잘못 판단해서 얘기를 안 했다고 쳐요...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때로 돌아가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돌릴 수 있나요?

저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다른 해결 방법이 있어 보이면 얘기를 해줘 보세요.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게요.

그러니 이제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믿어 주시고.... 부탁이니 김 선생 이야기는 그만해 주세요."


남자는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한숨에 마셨다. 눈동자는 핏줄이 서있고 입은 풀리기 시작했다. 여자도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한 번에 마셨다. 남자는 여자가 술에 취하는 것이 두렵다. 사실은 술에 취한 여자가 어떤 필터도 없이 내뱉게 될 비난이 두려운 것이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에게 못 가니... 당신이 누구를 만나든 제가 상관할 자격이 없어요. 그렇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최소한의 예의를 다해 숨기지 말고 이야기했어야죠."


"나는 당신이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고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지만 내 여자가 될 거라 믿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잖아요."


"첫 만남부터 저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무시하고 혼자서 가정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거죠. 그것도 자신에게 끝나지 않은 인연이 있다는 것도 숨기면서."


"몇 번을 말합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데 계속 김 선생을 문제 삼으실 겁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고 앞말이 뒷말을 씹어 삼키듯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남자와 여자는 술에 취했고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렇다고 119를 부를 지경까지 가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김 선생 일로 크게 싸운 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였다. 여자를 보지 못하는 2달 여의 시간이 죽을 것 같았다. 남자에게 여자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왜 보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는지 시간이 아까웠다. 우리와 상관이 없는 사람 때문에 싸우는데 시간을 낭비하다니 어리석은 짓이다. 여자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여자를 다시 만났다. 여자를 보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여자의 따듯한 가슴을 느끼고 부드러운 살결에 얼굴을 묻고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여자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격렬한 사랑을 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남자가 요동을 느끼고 일어났을 때 여자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얼굴은 피가 몰려 시뻘겋게 변해 터질 듯했고 숨이 안 쉬어지는지 끅끅 소리를 내며 몸을 뒤챘다. 여자가 죽을 것 같았다. 공포가 그렇게 갑자기 찾아든다는 것이 신기했다. 남자에게 깃든 공포 중에 하나는 여자가 여기에서 잘못되면 그 후에 겪게 될 경찰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게 될 불륜이었다.


남자는 불륜이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자신의 오해로 시작된 만남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얘기도 통하고 매력적인 여자, 끌리는 여자와 부부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아주 여러 번 여자에게 집요하게 얘기했다. 그런 여자를 잃게 될까 봐, 여자가 헤어지자는 말을 할까 봐 걱정하느라 신경이 곤두서있던 날들. 이제 불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구나. 여자가 여기서 잘못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119죠. 제 여자친구가 숨을 못 쉬어요. 빨리 와주세요.


남자는 여자의 심장을 마사지하고 몸을 비볐다. 여자를 끌어안고 정신 차리라고 외쳤다. 여자는 숨이 끊길 듯 컥컥 대면서도 남자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당신, 왜 그래요. 정신 차려요. 내가 옆에 있어요."


여자의 호흡이 느려졌다. 다행히 119가 출동하기 전에 여자의 호흡은 돌아왔다. 남자는 처음 겪는 일에 넋이 나갔다. 여자를 안고 있는 팔이 파르르 떨렸다. 호흡이 돌아온 여자가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당신이 사랑만 생각하고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에게 가고 싶어요."


남자는 여자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정말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여자가 또 다른 신체 변화나 조울증 증세를 보일까 두려웠다. 남자는 진심을 다해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지 마요. 나와 있는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나는 당신만 바라보는데 왜 내 마음을 몰라줘요. 나는 당신을 잃게 될까 봐 걱정돼요."


여자는 잔기침을 하며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앉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저를 놓지 않는 한 저를 잃는 일은 없어요. 다만 제가 당신을 놓아줘야 하는 상황만이 있을 뿐이죠."


남자는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여자와 같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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