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틈새의 미학
나비와 개미떼가 몰려오는 환상으로 정신을 놓은 책. 그 책이 바로 <백 년 동안의 고독>이다. 이 책을 완전하게 읽기까지 20년이 걸렸다. 마르께스의 명성과 노벨 문학상 수장작이라는 타이틀은 문학을 지향하는 문학도로서 꼭 읽어야 할 텍스트였다. 그래서 20년 전에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었다. 그때는 다시 읽을 수 있는 시간이 20년이나 걸릴 줄 몰랐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일생의 과제처럼 다시 읽은 책. 결과는 전율이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장대한 역사적 입장에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환상과 마술적 기법을 중점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마르께스가 콜롬비아인이고 콜롬비아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역사적 사실과 바나나농장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결국은 13명의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한 사실이 책 속에서는 300명이 되든 그것은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다. 나에게는 20년 전에 꼭 읽어야 될 필요성에 의해 읽기 시작했으나 실패한 책을 읽어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 만약 읽었더라면 절대 찾아내지 못할 보물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보물이라는 것이 대단할 것도, 더욱이 나의 것도 아닌데 가슴이 떨린다. 내가 발견한 보물은 이미 마르께스가 깨달아 글 속에 박아놓은 것인데 그것을 주워 들고 감동하는 꼴이다. 그래도 좋다. 가슴에 얹힌 체증처럼 묵직했던 인생의 과제를 푼 것 같은 산뜻함으로 내가 발견한 보물을 음미하고 싶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나만의 가계도를 만들어 대조하면서 읽어야 했다. 이 과정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나 역시도 예전에 실패했을 것이다. 물론 머리가 좋다면 굳이 가계도가 필요하지 않겠지만 나는 필요했다. 백 년 동안 5대에 걸친 역사와 고독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가계도는 물론이고 이름들을 세대별로 분류해야 했다. 그 덕분에 어려운 이름들 속에서 세대 간의 구분을 하게 되었고 책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나침반 역할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정작 내가 전율하고 마음을 뺏긴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발견한 보물이다. 그리고 그 사소함이 마르께스로 하여금 대작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첫 번째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표현은 내 가슴을 훑고 내렸다. 5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대 장편 속에서 그 사소함이란 정말 작은 것이었다. 등장인물 중의 주요 인물도 아니었고 독자가 집중할 겨를이 없는 아주 느슨한 지점에 그것은 놓여있었다. 5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손이 아니면서 그 중심에 예언자적 존재로서 핵심에 놓여있는 집시 멜퀴아데스의 틀니, 그리고 그곳에 핀 노란 꽃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이해하는 코드로 작용했다. 본문에서 인용하면 ‘틀니에 뿌리를 내려 노란 꽃이 핀 유리잔도 가져다 놓았다’ 이 부분이다. 이 표현을 마주하고 가슴에 와닿던 시적인 이미지는 잊지 못할 것이고 잊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20년 전에 이 표현을 대했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콘도라는 마을에 문명의 이기를 나르는 집시였던 멜퀴아데스가 노년을 마콘도에서 보내면서 어느 날 틀니를 빼고(그 틀니 역시 문명의 다른 이름으로 기억되는) 유리잔에 담아놓고 잊게 된다. 세월이 흘러서 그 틀니에 있는 틈새에 씨앗이 날아 들어와 노란 꽃이 피는 장면이다.
내가 마음을 뺏긴 이 장면은 단 한 줄로 정리되어 있다.
‘틀니에 뿌리를 내려 노란 꽃이 핀 유리잔도 가져다 놓았다’
틈새... 잊힌 틀니에 무심하게 피어난 노란 꽃... 그 한 줄에 매혹이 되어 열정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을 마지막에 얻을 수 있었다. 대 장편에 기록된 이야기들 중에 아주 사소한 부분에 희열을 느낀 것이 사실은 거대한 발견이라는 것을 후반부에서 알게 되었다. 그것 역시 사실은 나의 착각일 수 있다.
‘백 년 전에 우르슬라가 유리잔에 담가두었던 멜퀴아데스의 틀니사이에서 본 노란 꽃이 피었다’는 또 한 줄의 표현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그대로 담고 있다. 틈새와 백 년, 그리고 고독. 우르슬라의 과거 회상으로 독자들은 우르슬라의 기억과 추억을 같이하며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과정 중에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는 우르슬라의 생각에 자연스럽게 이입된다. 그 지점이 바로 틀니에 피어 난 노란 꽃이다.
1대를 살든 5대를 살든 인생은 원을 그린다는 것을 노란 꽃으로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 꽃이 피어난 장소가 틀니라는 것이다. 틀니의 주인은 마콘도의 가장 명석했던 남자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마콘도의 백 년을 미리 내다본 예언자였다. 그가 양피지에 암호로 기록한 백 년 동안의 역사는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은 듯이 아우렐리아노 가문에 마지막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우렐리아노에 의해 해독된다.
백 년 동안 날마다 일어날 사건들을 한순간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적어놓았고, 이러한 비밀의 실마리를 아루렐리아노가 풀어내게 된 것은 아라란타 우르슬라의 사랑에 얽힌 복합적인 상황이 빚어낸 혼돈에서였다
두 번째로 마음을 뺏긴 사소함은 나비 떼가 날아드는 장면이다. 전편을 놓고 볼 때 나비 떼를 거느리고 출현하는 인물은 그 가문의 한 여자와 잠깐 사랑하다 죽는 기계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서도 마음속에 남는 나비 떼의 잔상은 어쩔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저녁마다 목욕탕에서 나비 떼에 둘러싸여 사랑을 나누는 몽환적인 장면은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독자의 상상력과 환상을 최대화시킨다. 나비 떼가 떨구고 간 꽃가루에 온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사로잡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이면서 이 가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들에게 애정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다시 읽음으로써 사소함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행복을 느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분석을 다시 하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혹시 20년 후가 될지라도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