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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불사에 이르는 길

플라톤 『향연』을 읽고

by 몽상가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불사에 이르는 길



Q: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겁니까?

A: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거죠

Q:하지만 그 대답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됩니까?

A: ‧‧‧‧‧‧.

Q:하지만 누군가가 질문을 바꾸어 아름다운 것 대신 좋은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묻는다고 해 봅시다. 좋은 것들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겁니까?

A: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거죠.

Q:그런데 좋은 것들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됩니까?

A:이건 더 쉽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행복하게 될 겁니다.



위의 대화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와 소크라테스의 문답이다. 향연에 참석한 인물들이 에로스(사랑)에 대한 찬사를 돌아가며 끝낸 후,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연설자인 아가톤의 수사적 연설에 대한 찬사와 함께 반박을 하면서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통해 아가톤에게서 동의를 이끌어내고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반론조차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가톤 스스로 반론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이 반론 못한 것은 진실에 대해서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자신도 똑같은 형식으로 만티네아 여인 디오티마에게서 심문받으며 이야기를 풀어 갔던 방식 그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지혜의 여인으로 내세운 자가 디오티마였다. 디오티마와 소크라테스의 처음 문답에서 “에로스야말로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결여하고 있는 바로 이것들을 욕망한다”는 동의를 바탕으로 앞서 연설한 젊은 지성들과는 다른 해석으로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서, 에로스는 누구이며 에로스의 기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좋음의 이데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향연은 절정에 이른다.


향연은 모여서 술 마시는 행위, 즉 술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향연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오랜 전통이 있는 모임의 형식이다. 향연은 ‘심포지엄’을 번역한 것으로 현재 각양각색의 심포지엄이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다. 학회에서 내건 심포지엄에는 술이 없다. 당연히 술판이 없다. 술이 빠진 심포지엄보다 술판이 벌어진 플라톤의 ‘향연’에 이끌리는 것은 개인적 취향일 것이다. 거기에 모두가 술에 취해 잠에 빠져들었을 때 말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멀쩡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과 함께 ‘좋음’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향연이 될 것임에 분명하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향연 예찬론자이면서 에로스에 가득 차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자식을 출산하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에로스에 가득 찼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결핍과 채워지지 않음인데 가득 찼다고 했기 때문이다. 서두에 소개한 디오티마와 소크라테스의 문답 이전에 두 사람이 동의한 “에로스야말로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정의에 입각한다면 어떻게 가득 찼다는 표현이 가능할 수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것으로 바꿔 생각해 보자.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는 무지의 자각은 많이 알수록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아이러니를 생성하는 것처럼 에로스가 가득 찼다는 것은 좋은 것에 대한 사랑, 즉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에 대한 갈구를 뜻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좋은 것이 자기에서 있기를 추구한다. 또한 내가 아름다운 사람을(사랑) 만나 자식을 출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 이면에는 플라톤이 펼친 철학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의 기능은 “몸에 있어서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낳음과 출산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좋은 것이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좋은 것과 더불어 불사를 욕망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이 이야기로부터 사랑이 불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는 것이 요지이다. 모든 사람들은 몸에 있어서나 영혼에 있어서나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데, 영혼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이어진다. 사리분별과 덕, 절제와 정의 등이 영혼에 임신이 되면 출산을 앞둔 그 혹은 그녀는 그 안에서 그가 낳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돌아다니게 되며 임신하고 있기 때문에 추한 몸들보다는 아름다운 몸들을 더 반기며 영혼이 아름다운 자와 접촉하여 그와 사귐으로써 오랫동안 임신해 온 것들을 출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곁에 있을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그를 기억하며,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을 그와 더불어 기르”면서 아름답고 더 불사적인 아이들을 공유하게 된다.


출산에 이르게 되기까지 사다리(계단)를 이용하여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이 바로 ‘에로스의 사다리’이다. 사다리를 이용하여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부터 모든 아름다운 몸들로, 그리고 아름다운 몸들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들로, 그리고 행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 그 배움들 에서부터 마침내 저 배움으로, 즉 다름 아닌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올라다가 보면 마침내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불사의 상태가 된다.


나는 여전히 욕망한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자식을 낳고 불사의 길에 들고 싶다고. 그리하여 에로스의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싶다고.

당신은 불사를 욕망하는가? 그렇다면 당장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라. 향연장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술판을 벌이는 것도 좋겠다.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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