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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고 죽자

크리슈나무르티『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고

by 몽상가

죽어라고 죽자


한 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작을 한 권이라도 보지 못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붐이 일었었다. 나 역시 그때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채의식처럼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과 나이가 달라진 최근에 책장을 뒤적거리며 오래된 책들을 만져보고 꺼내보다 다시 손에 들게 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다른 감각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조금 젊었던 시절에 무턱대고 경외감에 차서 혹은 의무감으로 읽었던 때와 달리,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긍정적인 오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이라고까지 할 수 없지만 독서를 방해하는 한 남자로 인해 읽었던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더딘 독서를 해야만했다. 고백하자면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내 머릿속에 함부로 들어차고 수시로 출현하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로부터 기인한 일이었다. 그 사내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의 독서와 호불호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글의 말미에 알려주기로 하고 이 책의 특성상 저자인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정보가 우선되야 할 듯하다.


남인도 첸나이에서 태어난 크리슈나무르티는 열 네 살에 신지학회로부터 새로운 메시아로 지목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세계의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별의 교단’의 교조가 되었다. 18년뒤 메시아로 추앙받으며 세계의 스승으로 즉위하는 날, 자신의 교단을 스스로 해체하고 엄청난 재산마저 포기하면서 진리란 종교적인 조직이나 교단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설파했다. 해체 선언문을 통해 자신의 길을 선포한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의 저작물들이며 70여권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크리슈나무르티라고 되어있지만 그가 집필을 해서 출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강연, 대담 등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모든 것들이 들은 자에 의해서 씌어졌고 책으로 출판된 것들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고 오감으로 반응하게 된다. 위대한 사상가의 면면을 육성으로 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몰입하다보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단 한가지가 무엇인지 찌릿하게 관통하는 지점에 이른다. 아래 두 가지 다른 비유를 통해서 하나로 모아지는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이다.


1)당신이 “증오하지 말아야 해. 내 가슴속에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중의 기준을 가진 위선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순간 속에 산다는 것은 아무 비난이나 합리화 없이 사는 것이다. 있는 것속에, 실재하는 것 속에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분노를 완전히 이해하는 나머지 그것을 끝낼 수 있다. 당신이 명징하게 들여다볼 때 문제는 풀리게 된다

2)요구는 이중성에서 나온다.

“나는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바로 그 요구 속에 불행이 있다. 착해지려고 노력할 때, 바로 그 선(善)인 그것이 반대인 악(惡)인 것이다. 긍정된 모든 것들은 그것 자체의 반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극복하고자 하는 그것을 강화시킨다. 당신이 진실 또는 실재를 체험하고 싶어할 때 그 요구는 바로 현재 ‘있는 것’에 대한 당신의 불만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요구는 요구와 반대되는 것을 낳는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것 속에는 ‘있었던 것’이 들어있다. 그래서 이 끊임없는 요구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중성의 회랑(回廊)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 자신을 아주 완전하게 앎으로써 마음이 더 이상 뭔가를 찾지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1)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2)는 명상에 대하여 라는 부제로 각 장을 이루는 내용의 일부이다. 이 두가지 글 속에서 핵심을 잘 파악한다면 책 한 권 분량으로 크리슈나무르티가 전하고자 한 요체에 근접하는 것이자 진리에 이르는 길에 접어들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마음으로 글귀를 음미해본다면,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지금, 순간 속에서 ‘내’가 변화해야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적 스승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먼저 죽으라고. 여기서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더 이상 뭔가를 찾지않는 단계 즉,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을 은유한 것이다. 마음을 비워(죽음) 내적변화에 이르는 길이 진리라는 말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전 세계를 돌면서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은 것은 오직 한 가지, 죽음으로 비유된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쯤에서 서두에 언급한 거대한 몸집의 사내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주지했듯이 크리슈나무르티가 깨달음을 얻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것’은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 크레타섬의 무식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진 ‘조르바’가 말하는 ‘그것’은 가지는대로 덜어내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덜어내는 것. 결국 진리와 동의어인 ‘그것’은 메시아로 지목되었던 인도인 크리슈나무르티나, 무식하고 열정적인 그리스인 조르바가 공통된 진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사실 조르바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아니라 마른 몸피를 가졌다. 그럼에도 항상 조르바를 떠올릴때면 거대하고 우람한 모습이 연상되었다. 왜냐하면 크리슈나무르티와 조르바의 공통 진리인 마음을 비워내는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이기에 거대하고 우람한 모습으로 마음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크리슈나무르티의 육성이 쩌렁쩌렁 울리고, 거대한 몸짓의 조르바가 겹쳐져 닮은꼴의 진리가 만나는 지점이 생길 때마다 더딘 독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밝혀졌다. 결국 이 세계의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어라고 죽는(마음을 비우기) 일 밖에 없다. 죽어라고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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