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피로사회』를 읽고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의 결과,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신경증적 증세를 진단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재독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독일에서 먼저 출간되어 단기간에 2만 부가 팔려나가고 독일 최고 권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한병철 교수의 철학적 업적에 대한 특집기사를 다루면서 독일 언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피로사회’는 2012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독일 주요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주목받은 철학서라는 평가가 긍정적인 여파를 몰고 왔다. 덕분에 철학서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고, ‘피로사회’라는 용어가 기존에 있었던 것인 양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특히 인문학 독자들에게는 128쪽 문고판으로 된 이 얇은 철학서가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논증의 방식은 다소 학문적이긴 하나 이 시대와 신경성 폭력을 연결하는 고리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피로사회’에서 펼쳐진 논증이 독자들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 사회가 안고 있는 폐단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있다고 단언한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즉,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자살률 1위인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한국의 심리적 경색은 절망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과사회는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내어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고 지배 없는 착취가 자행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결국 성과사회의 피로는 개인을 신경성 폭력에 노출시킴으로써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것이 한국의 현주소이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학생들의 자살률이 해마다 증가하는 데 있다. 스스로 성과주체가 되기에는 미성숙한 학생들이 주변의 가혹한 성과체제에 따라 착취당하거나 스스로 착취당함 속에 빠져듦으로써 성과의 목적이 무엇인지 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순간들을 경험한다. 참담한 피로에 허우적거리다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에 맞서 싸우지 못한 학생들이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선택한 행위는 한국사회의 성과지향적인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근 자기주도 학습에 대한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각 대학에서 입학사정관제나 특목고의 자기주도학습 전형 등이 마련되었다. 그 이후 학원가에는 자기주도학습 전문학원이라는 사설학원들이 생겨났고 학생들은 과중한 학교 공부와 기존에 다니던 학원 외에 다니는 학원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학원이 대신 도와주는 학원이다.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는 학원?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뜻을 모르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 사설학원들과 성과주체인 양하는 수요자들(어른)은 성과주체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성과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명문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절실한 명제 하에 스펙을 쌓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피로가 가중되고 신경성 폭력은 분출한다. 그러한 학생들이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와 성과체제 내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불 보듯 뻔하다.
피로를 권하는 사회는 신경성 폭력으로 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폭력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인가? 미성숙하지만 아름다운 청소년 시기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장 시급한 방안 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색보다 검색이 우위인 사회,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심심할 겨를이 없는 사회. 우리는 그러한 검색과 심심하지 않음이 오히려 정신적 황폐와 영혼의 경색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피로사회’에서 제안한 방법은 사색과 깊은 심심함이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인바 성과사회에서 지향하는 분주함과 신속한 정보처리 능력은 점점 사색과 심심함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의 경색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1위였던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성과사회에서 피로에 찌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치유해 주는 역할을 했다. 책 제목처럼 멈춰야 보인다. 멈춘다는 것은 사색과 깊은 심심함의 세계에 나를 맡긴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했다 한다. 꿈의 새가 비상하는 사회에서의 피로는 긍정성의 피로로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깊은 심심함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이다. 그것이 영혼의 경색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바리케이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