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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홀려 살기, 안 살기

밀란 쿤데라『농담』을 읽고

by 몽상가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나오는 주인공 루드빅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고향에 돌아와,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장면이다. 루드빅의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시대에 작가 밀란 쿤데라는 배짱 좋게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프랑스로 망명을 해야 했다. 그를 망명길에 오르게 했던 농담은 루드빅의 입을 통해 발설된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이 짧은 엽서에 적힌 세 문장 때문에 루드빅은 자신의 신념과도 같은 당에서 축출당하고 학업도 타의에 의해 중단하고 정치범으로 낙인찍힌 채 군 생활을 하게 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의 적으로 공인되어 살아가게 만든 것은 장난처럼 시작한 농담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해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충격을 주고 싶은 젊은 치기가 발동했던 순간, 루드빅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 세 문장을 엽서에 써넣었다.(진정으로 농담이었던, 그러나 지적 오만이 스며있는) 그 후,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와 당의 처분으로 인하여 자신과 무관하게 인생은 굴러갔고, 그 사이에 낀 루드빅은 복수의 날을 세우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복수를 결행하는 그날, 루드빅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통탄해 마지않는다. 결국 자신이 속한 인생에서 자신의 던진 농담은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증오했으며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한 장본인이었던 제마넥의 아내인 헬레나를 유혹하는 것으로 복수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제마넥은 그것에 대해 전혀 상처를 받거나 마음 쓰지 않는다. 이미 제마넥과 헬레나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제마넥은 자신의 젊은 연인을 앞세우고 루드빅과 헬레나의 교제에 긍정적이었다. 오히려 제마넥의 입장에서는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루드빅은 증오의 대상이며 복수의 대상에게 자신이 복수를 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복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신념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자신이 홀려 있는 과거일 뿐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러한 순간들이 없을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한 농담 같은 세상”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홀려있다.


루드빅이 살았던 시대가 냉전시기였기에 농담이 주는 서늘함이 더욱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다를 것이 없다. 이 순간 전 지구적으로 과거에 홀려 사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을 증오와 복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소가 지구를 녹아내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과거에 홀려서 오랜 세월 마음속에 원망을 키워왔던 적이 있다. 상대방으로 인해 철저히 내가 상처받았으며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음을 다시금 알게 되는 과정에서 원망이 켜켜이 쌓여만 갔다. 끝 간 데 없이 쌓인 원망은 더 이상 가슴속에 담아 둘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잔인한 말을 동원하여 마음을 찢어발기고서야 끝났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제야 원망을 그칠 수 있었다. 내가 홀려있던 과거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루드빅이 15년이란 세월을 건너고 자신의 복수가 헛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 나 역시 그만큼의 세월이 걸렸다.


과거에 최면이 걸려 복수의 끈을 자신에게 묶어놓았던 루드빅을 통해서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었던 것을 다시금 알게 됐다. 루드빅과 나와의 다른 점은 루드빅은 실제적인 복수를, 나는 정신적인 원망만을 했다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이제 루드빅도, 나도 지옥에서 벗어났다. 이 순간, “아름다운 파괴‘라는 자기 본위의 정당성 앞에 서있는 누군가에게 코스트카가 루드빅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당신이 비웃는 환상이 정말로 단지 환상이기만 한 것일까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나요?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어쩌죠? 또 그것이 가치 있는 것들이고, 당신은 그 가치들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면요? 더럽혀진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둘 다 한심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둘은 아주 비슷해서 혼동하기가 아주 쉽지요.”


당신을 홀렸던 과거, 그때, 당신이 하지 못했던 모든 것, 그로써 홀림은 점점 진화하고 신화화하여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 몫이다. 과거에 홀려 살기, 안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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