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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고

by 몽상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관객모독’으로 알려진 페터 한트케의 작품이다. 전직 골키퍼였던 한 남자의 사생활을 아주 심드렁하고 건조한 문체로 스쳐 지나가듯이 자잘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목에서 느끼는 야릇한 호기심은 주인공의 사생활을 따라가면서 저절로 제목이 함축한 의미와 함께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개념의 하나인 ‘내던져짐’에 대한 오싹함을 경험하게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란 단지 타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이거나 개인의 내면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가 머물고 존재가 세계 및 사물과 만나는 곳이다. 즉, 언어는 존재의 근원이자 바탕이 된다. 그 언어의 세계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으로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라니‧‧‧‧‧‧ 관중도, 선수도, 심판도 이 세상 누구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를 도와주지 못한다. 오직 ‘나’만이 골대 한가운데 있다. 그 ‘나’가 바로 내던져진 ‘우리’인 것이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에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전직 골키퍼였던 주인공을 통해 이 세상에 내던져진 한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펼쳐내는 작가의 재능은 능청스럽다. 더구나 55년 전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인간이 처한 극도의 불안과 소외와 소통 불능의 상태를 심드렁하고 밋밋하게 스케치하듯 지나치며 결국엔 경악하게 만드는 것일까?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의 독특한 매력을 통해, 최근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뜨거움이 넘쳐나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끓어 넘치는 격정과 파괴와 피가 난무하는 영상미가 가미된 작품들 속에서 휴식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된 탓이다.


아니러니 하지만 그야말로 휴식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에서도 주인공 블로흐는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갑자기 목 졸라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살인과 범죄가 일상인 듯 그려지는 소설들 속에서 그렇듯이 여기서도 똑같은 범죄가 일어난다, 그러나 보여주기 방식과 받아들이는 독자가 느끼는 감각의 종류가 다르다. 왜냐하면 독자는 그것이 살인이었다는 것조차 바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가는 심심하게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라는 여운으로 지나친다. 죽은 여자는 블로흐가 “이야기한 모든 것에 그가 끼어드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그의 이야기에는 거침없이 끼어들었는데, 그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겼다.”라는 것에서 다만 주인공의 감정 상태를 추론할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명쾌한 동기나 그럴만한 행동의 이유 등이 생략되어 있다. 그냥 살짝 지나치기. 여기에 ‘다름’이 존재한다. 그 후로도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 모든 사물들과 풍경과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냥 지나가고 지나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소통불능의 현 존재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또 다른 기호로 다가와 소외와 불안은 극에 달한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끌었다. 풍경들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를 위해서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가 바라보는 주위 풍경들은 글자의 형상으로 그의 눈에 확 들어와 박혔다. ‘호출 부호 같군’ 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지시문 같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타났다. 그가 바라본 부분들은 가장자리가 반짝거리고 흔들리는 듯이 보였다.”


블로흐는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것을 해고의 표시로 해석한다. 자의적인 해고일 수도 있는 이 행동은 자신의 모든 주변의 것들을 자신만의 기호로 대체시키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거리로 나온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매번 무시되거나 다른 방해 요소로 인해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이런 자잘한 일상들을 통하여 주인공이 오래전부터 소통불능의 상태에 있었고 누적된 심리적 압박은 사변적인 것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전이된 불안으로 나타난다. 독자는 결국 거기에서 오는 불안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짐짓 심드렁함과 심심한 체하며 딴전을 피우는 어조와 묘하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조한 문장 속에서 제목처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나의 불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페널티킥 앞에서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나 최근 젊은 작가들의 패기 넘치는 실험작에서나 양쪽 모두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소외를 다루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다루는 방식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지만 결국은 문장이 발휘하는 ‘힘’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는가 하는 것에서 감동의 격차가 발생한다고 본다. 소외되고 불안한 주인공이 결국 소통불능자라는 것을 벙어리나 난독증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스쳐 지나가듯이 보여주면서 사회 저변에 소통불능의 늪이 깊다는 것을 일깨우듯이 말이다.


스마트폰이 내 손안에 있는 세상에 있는 우리는 어떤가? 최첨단 기계 속에서 소통이 최첨단화 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손바닥 위에 놓인 기계가 전부인양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 중에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볼일이다. 55년 전 ‘페널티 킥 앞에 선 골키퍼’가 출간되었을 당시, 스마트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55년이 지나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현시점에서 우리들의 소통은 업그레이드되었는지 자문해 볼 시점이다. 그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소통불능자의 불안과 소외가 어느 쪽이 더 심각한지, 소통불능의 늪이 더 깊은지는 말이 필요 없다고 보인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누군가는 그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물론 그러한 자각과 품격에 가치를 두지 않는 혹자들에 의해 피가 난무하는 자극적인 것들이 우선인 세태에 만족을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으로 향하게 하는 지침서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내던져진 존재인 우리들의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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