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9화
XY9
남자는 왼쪽 가슴에 남은 흉터를 만졌다. 세로로 난 흉터는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지만 칼날이 가슴에 와닿던 순간과 살기로 번뜩이던 여자의 눈빛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식탁 위에 남은 칼자국들... 식탁을 볼 때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무엇을 이용했는지 말하세요. 그 말 때문에 난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내가 당신을 이용했어요? 뭘 이용했어요? 그것만 말하세요.
말해요... 말해요... 뭘 이용했는지... 고문에 가까운 여자의 집요한 질문과 칼부림으로 인한 긴장 속에서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여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술이 취했고 집요한 질문에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고 졸음이 쏟아졌다. 여자는 어떻게, 무엇을 이용했는지 말하라고 다그치고 강요했다. 여자의 반응에 오히려 남자가 놀랐다. '이용'이라는 말이 여자에게 발작과도 같은 충격이 되어서 칼부림에 이르게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여자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이용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듯했다. 이용했다는 말을 들은 여자가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을 때 남자는 기꺼이 칼에 가슴을 내주었다. 자신의 한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면서도 남자에게 올 수없다는 것은 명백하게 남자를 이용하는 것인데 그 사실을 여자가 모른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얀 식탁에는 칼이 찍힌 곳마다 까맣게 속이 드러났다. 열 군데가량 칼자국이 남았다. 여자가 사준 식탁, 남자의 집에 있는 대부분이 여자가 사들인 것이다. 가구나 물건은 대부분 하얀색이다. 여자가 좋아하는 색상이기도 하고 남자가 좋아하는 취향이기도 했다. 소파, 책상, 커튼, 주방용 전자기기, 그릇을 비롯해서 남자가 입는 옷과 신발까지 여자의 손을 거쳤다. 그중에서 식탁은 가장 중요한 물건이다. 여자가 남자만을 위해 만든 요리가 올라왔던 식탁... 수없이 많은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을 나눴던 식탁에서 남자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날도 더없이 황홀한 사랑을 나눴던 천국이 몇 시간 뒤에는 지옥으로 변했다. 여자와는 항상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죽을 듯이 사랑하고 죽도록 싸웠다. 결과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가 남자를 이용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여자가 생각하는 이용이라는 개념과 남자가 생각하는 이용개념이 다를 뿐이다. 여자는 남자를 이용했다. 그것을 부정하는 여자와 끝났다. 칼부림을 끝으로 여자는 호주로 떠났다.
여자와 정기적으로 가던 시립예술단 연주회에 왔다. 한 달 전에 여자와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엘가의 수수께끼'를 같이 봤던 대공연장이다. 남자는 티켓을 꺼내 좌석을 확인한다. 1층 다열 87번... 여자와 앉았던 곳과 멀지 않다. 남자는 손을 마주 잡는다. 여자와 손을 잡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던 때가 떠올랐다. 남자는 마주 잡은 손을 풀었다가 다시 잡기를 반복한다. 여자가 좋아하는 첼로 부분이다. 가슴에 통증이 왔다. 관객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박수소리에 정신이 들었고 연주가 끝난 것을 알아차렸다. 2시간 동안 정신이 어디에 가있었던 건가.
남자와 여자는 연주회가 끝나면 근처 호프집에서 그날의 연주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맥주를 마셨다.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차를 이용하지 않고 전철로 오갔다. 전철을 타고 오갈 때마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안았다.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연주회 감상평에 열을 올리던 단골 호프집을 지나쳤다. 혼자 그곳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남자는 혼자인 것이 두렵다.
이혼 후에 닥쳐온 정서적, 경제적 루저로서의 삶과 혼자 내던져졌다는 상실감은 이혼보다 더 힘들었다. 철저하게 혼자였다. 이혼 당시 6살이던 아들은 14살이 되었다. 아들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처가 아빠에 대해서 원망과 비난 일색으로 말했기 때문에 아들은 남자와 거리를 두었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남자가 태국 출장을 가게 되면서 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만나게 돼도 거리감을 더 느끼게 될 뿐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간혹 적대감마저 비추기도 했다. 아들은 전처에게 세뇌를 당해서 아빠의 외도로 엄마가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실은 전처의 외도로 인해 생긴 파탄이었는데 굳이 아들에게 진위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아들을 볼 때마다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모습에 내 아들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유전자 검사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여자에게 유전자 검사 이야기를 했을 때 여자의 얼굴에 스쳐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기억한다. 그 표정은 마치 전처가 인간쓰레기를 대하듯 남자를 바라보던 표정과 비슷했다.
전처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고 지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정서적으로 늘 허전하고 결핍을 느꼈던 결혼 생활이었다. 여자와는 말이 통했다. 예술 전분야에 걸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미술 전시와 연주회를 같이 감상하며 역사에 관심이 많아 유적지를 돌아보는 여행 취향까지 완벽하게 맞았다. 여자와는 남자가 바라던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으니 여자와 같이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였다. 심지어 속궁합까지 맞는 여자를 이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속궁합이 맞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몰랐다. 여자를 만나 속궁합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황홀했다. 말이 통하고 취향이 같고 속궁합까지 맞는 매력적인 여자와 같이 살고 싶었다. 어느 날은 속궁합 예찬론자가 된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여자가 물었다.
"당신은 속궁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만약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속궁합이 맞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당신 아들이나 당신 가족들과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사람이 싫다면 저는 가족들과 인연을 끊을 수도 있어요. 싫다는데 굳이 인연을 만들 필요는 없죠."
"흠... 속궁합이 맞는 사람과 살기 위해서 아들과 가족을 버릴 수 있다는 말이네요?"
"한 번뿐인 인생인데 행복을 선택해야죠."
여자는 그때도 전처가 자주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자신의 스탠스를 고집하는 여자와 말싸움이 났을 때, 남자가 여자에게 한 번뿐인 인생인데 왜 사랑을 택하지 않느냐고 다그치자 여자는 그 날일을 거론했다. 가족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날 남자가 아들과 인연을 끊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남자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단다. 한 번만 배신하는 사람은 없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든 배신한다. 여자를 이미 몇 번 배신한 적이 있으니 반드시 또 배신할 거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아들과도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사람, 절대 신뢰할 수 없다. 남자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배신은 또 뭐고, 여자를 몇 번 배신했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지. 여자의 극과 극을 오가는 조울증과 비슷한 증상이 도진 거라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말이 다 핑계로 들린다. 남자를 밀어내기 위해서, 남자와 헤어지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말이다.
연주회가 끝나고 호프집을 지나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자는 길 위에 멈춰 섰다. 이 길 위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입을 맞췄었다. 그 자리가 바라다 보이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여자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훅하고 내뿜었다.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연주 1부는 잘 안 들어 본 곡들이었고 2부는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이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교향곡의 맛을 처음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사실은 유튜브로도 보고 듣고 집에 있는 CD로도 들었는데도 공연장에서 받은 느낌 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들으면서 '이 작곡가는 정말 천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당신이 들었으면 울었을지도 몰라요. 아마 당신이 더 좋아했을 걸요. 당신은... 내 말 듣고 있어요? 당신...'
남자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아려서 머리를 들 수가 없다. 담배 연기는 떨어지는 나뭇잎에 맞아 찌그러졌다. 지금쯤은 여자의 몸에 생긴 멍이 지워졌을까? 남자는 여자의 몸에 생긴 멍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남자의 가슴에 남은 멍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여자의 몸에 생긴 멍도 지워지지 않기를... 담배연기가 바람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