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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10-파렴치한 연애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0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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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이다. 카페는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카페도, 남자도 1년 전 모습 그대로다. 여자는 자신만 늙어버린 것 같아 창에 비친 모습을 바라봤다. 여자가 기억하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나와줘서 고마워요.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어요?"


"한 달 지났어요."


"그렇군요. 얼굴 보니 좋네요."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얼굴을 봐서 좋다며 웃는 남자의 표정이 어색하다. 여자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가 신경 쓰였다. 남자를 잊으려고 몸부림쳤던 지난 시간이 소용없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 여자는 꾹꾹 눌러서 말을 했다.


"나에게 이용당했다면서 왜 만나고 싶었을까요?"


남자는 더 어색한 표정이 되어서 한참을 말을 골랐다.


"글쎄요... 이유는 없어요. 그냥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무슨 이야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지, 뭐 그런 거요."


여자는 짐짓 경쾌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로 남자에게 말했다.


"저는 잘 지냈어요. 호주에서 심리학 강좌와 어학 코스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이 보냈어요. 지금은 지도교수님이 계시는 심리상담연구소에 나가고 있어요."


"얼굴이 밝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여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밝은 표정과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남자를 보니 심사가 뒤틀렸다. 남자를 잊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시간과 남자의 악독한 족적들이 떠올랐다. 여자는 남자가 좋아 미치던 그 웃음을 지었다. 1년 사이 냉소로 변한 여자의 웃음을 남자가 알아차렸을까.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잘 지낸 거 같은데요? 당신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젊은 여자를 만나서 좋았다고?"


"무슨...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술에 취해서 한 말이라 기억에 없나 봐요?


여자가 호주에 있을 때 남자는 술에 취한 날이면 전화를 했다. 붉어진 얼굴로 보이스톡과 페이스톡을 번갈아가며 혀가 풀린 소리로 전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여자는 이제 그 일을 떠올려도 흥분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다만 냉소에 찬 목소리로 변할 뿐이었다. 덕분에 여자는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남자에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이 나와 인연을 끊을 때 그 이유에 공감하고 존중했기에 따랐어요. 어느 날 뜬금없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다시 보는 것은 인연을 끊을 때처럼 공감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인연을 끊을 때 보다 더... 당신이 한 선택, 나와의 인연을 끊고 다른 인연을 만나는 행위에 명확한 이유가 있듯이 그 선택을 뒤집는 일을 할 때는 더 명확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겠죠."


"생각처럼 안 되네요. 마음도 그렇고... 얘기를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했어요. 당신한테 기억도 못 하는 전화를 한 것도 그랬는가 본데..."


'말할 상대가 필요해서 나를 이.용.한 건가요?"


"............................................................."


"당신은 발정 난 개새끼 마냥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면서 붙어먹다가 잘 안 됐다며 나에게 징징댔고 보고 싶다고 했어요. 내 덕분에 젊은 여자와 섹스를 해봤다고 보고를 하더군요. 성격이 무척 좋은 젊은 분과 가졌던 체위와 섹스의 장면을 신이 나서 묘사하면서 나와는 인연이 완전히 끝났다고 했어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으니 다신 나를 보지 못할 거라고... 그러더니 보름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 젊은 분과는 너무 맞지 않는다고, 나와 비교된다면서 궁합이 안 맞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끝냈다고... 횡설수설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젊은 분이 다른 남자들과 자고 다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당신이 그만둔 거였어요. 그걸 알게 된 당신에게 쿨하게 넘어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면서. 불과 2주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당신은 배설하듯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당신의 배설물을 뒤집어쓴 나는 어땠을까요?"


"너무 창피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가 창피하다는 건가요?


"내가 했던 말과 행동... 당신한테... 나는 기억도 못 하는..."


"10분의 1도 안 되는 말을 전해 듣고 창피해요? 미안하진 않고?"


"그 이상이에요."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하지 않았다. 자신의 한 말과 행동이 창피하다고만 했다.


"당신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모진 말들을 다 껴안고도 당신의 행복과 당신의 인생을 위해 나는... 당신을 보내고 잊기 위해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 와중에 당신이 술 취해서 보낸 카톡과 당신은 기억도 못하는 말들로 살이 내리는 시간을 보냈고 상처로 곪아터졌어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기도 싫지만,... 그렇게 되는 건 어렵게 되었네요. 나는 기억에도 없는,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이, 당신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게 부끄러워져서..."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창피하고 부끄럽다고만 했다. 어디까지 가볼셈인지 보자는 심정으로 여자가 말했다.


"젊은 분과 몇 번의 잠자리로 끝이 나고 본격적으로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인연을 만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는 카톡을 차단했어요. 당신을 잘 보내주는 게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나와 완전히 차단되어야 당신이 원하는 인생을 함께 할 다른 인연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당신 선택을 존중하고 공감하니까... 그렇게 잘 보내줬는데 왜? 잘해보지. 행복하게 잘 살지. 왜 다시 나를 찾아왔어요."


"당신이 더 생각났나 봐요."


"다른 여자를 만나고 더 생각났다?"


"만나서도 그랬고. 만나려고 할 때도 그렇고... 만나기 전부터였는데... 누굴 만나려고 해도 다들 너무 재는 게 보여서... 나는 새 여자를 만날 때 당신이 여자의 기준이 되었으니까요."


"그것 역시 내가 해 준 말, 특히 다른 여자와 같이 살게 되면 그때야말로 내 생각이 더 날 거라는 말 여러 번 했었죠."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내가 원한 건 당신이었는데 남편과 헤어져도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는 당신을 아무 희망 없이 호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라고요? 당신이 돌아와도 변할 게 없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원했어요.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었고요."


"그래서 당신이 스스로 나와의 인연을 끊어내고 다른 여자와 재미 볼 때 나는 그 시간을 혼자 견뎠어요. 다른 인연을 만나서 계속 재미 보시지 왜 나를 만나고 싶었어요? "


"당신이 나를 잘 아는 여자이고 좋은 사람이고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


"파렴치한이네요. 정말 파렴치하다."


여자는 갑자기 남자의 얼굴이 뭉개지고 형체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런 착시가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서도 있었다. 강의가 없는 날에 자주 가곤 했던 미술관이었다. 상설전시는 눈에 익어 편한 느낌을 주어서 걸음이 최대로 느려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림에 시선을 두었지만 그림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자가 좋아하는 다른 화가의 작품들이 아닌 형태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림 앞에서 여자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눈물은 울음으로 변했다. 급기야 바닥에 주저 않아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관람객들은 여자를 지나쳤다. 여자가 앞에 있는데 보이지 않은 듯이 무심하게 지나쳤다. 슬픔에 빠져있는 시간을 뺏지 않으려는 그들만의 배려라고 했다.


다 쏟아내고 눈물도 울음도 말랐을 때 여자는 미술관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얼얼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화폭이 남자의 얼굴로 바뀌었고 마치 슬라이드 영상처럼 여자와 남자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펼쳐졌던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인연을 끊어내겠다고 선언하고 새로 만난 젊은 분과의 잠자리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까지 들은 직후였고 여자가 사준 침구에서 여자와 사랑을 나눴던 침대에서 여자와 했던 체위를 시도했다는 말도 들었다. 남자는 온갖 말을 쏟아냈고 울었다. 울음 사이로 끊겨 나오는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여자도 울었다.


"이제... 곧 진짜... 우리...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아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인연을 끊어내겠다는 말보다 지독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 여자와 남자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여자는 술이 취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못할 남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같이 울었다. 남자가 여자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말은 이제 진짜 다른 인연을 만났다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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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비정기적으로 태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3개월 단위로 태국법인과 한국 본사 근무를 했다면 주재원 인원이 충당된 지금은 태국법인 인력이 부족할 때 출장을 가고 있다. 모처럼의 태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식탁에 남겨진 칼자국을 보자 여자와 마지막이 되었던 그날의 싸움이 떠올랐다. 여자는 호주로 떠났지만 식탁에 칼자국은 남아 그날을 환기시킨다. 남자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책장으로 가서 노트를 꺼냈다. 남자와 여자의 첫 경험 목록이었다. 여자와 만나면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적어 내려 간 목록이 55개나 되었다. 여자는 60개를 적었다. 남자가 54, 55번에 써놓은 것은 분명 자신의 필체인데 쓴 기억이 나지 않았다.


54. 가슴에 칼 대주기(칼을 맞아도 좋다고 생각함)

55. '사람을 이용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다-이것은 죽어도 싼 일이다.


여자가 '이용'이라는 말을 듣고 칼부림까지 하게 된 싸움 뒤에 쓴 모양이다. 남자는 목록을 읽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내용이 가득했다. 여자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많았다. 어느 날 여자가 목록을 작성하자고 제안했고 써 내려간 것이 55개, 여자는 60개가 되었다. 여자와 남자의 기록은 같은 것도 있었고 다른 것도 있었다. 목록 하나하나마다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 하는 일들을 많이 만들자고 방글거리며 웃던 여자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때는 목록의 마지막이 이런 내용이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피로가 몰려왔다. 샤워를 하고 일찍 자고 싶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남자의 눈에 식탁에 앉아서 첫 경험 목록을 읽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남자를 보자 방글거리며 웃는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여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실제가 아닌 것을 남자는 안다. 집안 모든 곳에 여자가 있다. 여자와 인연은 끊어냈으나 여자는 집안에 남았다. 여자와 같이 사랑을 나눴던 침대에 누웠다. 여자가 떠나고 남자는 여자를 잊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그중에서 처음 만난 젊은 여자와는 이 침대에서 섹스를 나누었다. 여자의 침대, 여자의 침구, 여자의 커튼, 여자의 체취가 남아있는 방에서... 이사를 가야겠다.


여자가 호주로 떠나고 나서 남자는 여자를 잊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결혼정보회사에 찾아가 상담을 했다. 상담 과정에서 마치 돈으로 사람을 사는 기분이 들었는데 담당자의 불손한 태도와 돈만 빼먹으려는 술수에 질려서 나와버렸다. 남자는 여자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게 목적이었고 여자와 비슷한 사람이라도 만나기를 원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여자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것은 한 번의 상담으로 파악이 되었다.


남자가 세상에서 원하는 사람은 오직 여자뿐이었다. 여자는 거절했고 남자를 선택하지 않았다. 남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결과적으로 같이 할 수 있어야 하고 솔로인 사람들이 하는 거였다. 여자와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포장을 뒤집어 씌우더라도 불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은 여자의 정부일 뿐이다. 남자는 법적으로 평생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다.


결혼정보회사를 대신할 다른 방법을 찾다가 데이팅앱을 추천받았다. 회사에 이혼남들이 데이팅앱에서 매칭된 여자들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입했다. 회원 등록을 하자마자 콜이 쏟아졌다. 남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력과 문화 향유 부분은 남자가 제시한 요건이어서 그에 부합하는 여자들만 추렸다. 그중에서 요건에 부합하는 여자 3 명과 만났다. 여자들의 프로필 사진은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실제 만난 그녀들은 사진과 다르기도 했지만 남자를 앞에 두고 계산하고, 재기 바빴고 심지어 체격이 왜소한 남자를 무시했다. 결정적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2명의 여자는 한 번의 만남으로 끝이었고 한 사람은 여자와 같은 나이였고 성격이 좋아서 3번 정도 만났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여자를 잊기 위해 다른 사람을 만날수록 여자가 더 생각났다. 젊은 여자와는 데이팅앱을 알기 전에 만난 사이라 자연스럽게 교제가 시작되었고 잠자리까지 가졌지만 여자와 비교가 되어서 당황했다. 심지어 젊은 여자는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남자를 만났고 다른 남자들과도 잠자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세상 여자들에게 환멸을 느꼈지만 그래도 다른 인연을 만나고 싶은 욕심에 데이팅앱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했다. 적어도 그들은 임자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같은 결론을 향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남자의 기대는 환멸로 바뀌었다. 남자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여자 같은 사람이었다. 남자가 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 여자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여자는 없었다.


아마 그때쯤에 여자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른 여자를 만나면 여자가 더 생각나고 보고 싶어 미치겠는 날, 술이 취했을 테고 다음날에 핸드폰에 남겨진 통화 내역과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차 싶었던 날들,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날들... 그러다 전화 연결이 되지 않고 카톡에 읽지 않음 표시인 1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여자가 차단한 것을 알아챘다. 차라리 고마웠다.


덕분에 부장의 소개로 만난 한 살 연상의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만남에서 오는 기대감이 여자의 생각을 지워나갔다. 데이팅앱이나 젊은 여자와는 달리 투명한 신상과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연상녀와 미래를 꿈꿔본 것도 사실이다. 자주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여행을 가고 섹스를 했다.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고 그렇게 여자를 잊었다고 착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상녀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 통한다고 느꼈던 것은 남자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맹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매사에 여자와 비교가 되었고 특히 말을 못 알아들을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 속궁합은 전혀 맞지 않았고,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섹스 자체가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내 복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포기하고 같이 사는 삶을 우위에 두기 시작했다. 남자는 절실했다. 혼자인 삶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그렇게 마음을 돌리고 연상녀와 만남을 이어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상녀가 화를 내고 돌아가더니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는 아직도 연상녀가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태국에서 3개월을 지내고 한국에 돌아오니 괜한 상념에 빠졌다. 여자는 호주에서 돌아왔을까? 남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가 생각나는 이 집에서 이사를 가야겠다. 여자가 남긴 칼자국이 있는 식탁도 버려야겠다. 여자가 사준 침구도 다 버리고, 여자가 사준 옷과 신발, 가전제품과 주방 기구, 커튼, 책상, 소파.... 또 뭐가 있을까? 여자의 흔적을 지우고 나면 집안에 남는 것이 없겠다. 갑자기 남자는 슬퍼졌다. 여자가 칼로 찔렀던 왼쪽 가슴의 흉터 부근이 시큰거렸다. 가슴에 통증이 번졌다. 남자는 통증을 줄여주는 방법을 찾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차단한 카톡과 라인을 지나 페이스북 메신저를 열었다. 여자와는 페이스북 메신저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페이스북은 차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남자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메신저 창에 열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들렸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남자의 입이 마르고 심장이 꽝꽝거렸다. 받지 마라...받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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