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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11-지랄 맞은 감정이여 안녕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1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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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페이스북 메신저의 연결음을 들었을 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통화 연결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여자는 발신자인 남자 이름을 확인했다. 연결음이 오래도록 멈추지 않는다. 한때 이름이 아닌 서로의 애칭으로 등록되었던, 지금은 다른 이들과 똑같이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남자.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바라본다.


여자는 자신과 인연을 끊어낸 남자가 선택한 인생을 위해 완벽하게 빠져줬다. 남자가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 완벽하게 보내줬다. 남자가 원하는 인생은 자신과 함께 할 인연을 만나 해로하는 것이었지만 여자는 다른 사람의 아내였기에 남자가 원하는 그 한 가지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위해 여자와의 인연을 끊어냈고 여자는 남자의 인생에서 빠져줬다. 여자가 호주로 온 뒤 몇 달간은 남자가 페이스톡과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카톡을 보내왔지만 남자가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든 것을 차단했다. 그렇게 1년 여가 지났고 남자를 잊기 위해 발악을 했다. 그렇게 애쓴 날들이 무색하게 남자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여자는 수신을 눌렀다.


"네."

"..............."


여자는 남자의 숨소리를 들었다. 여자가 전화를 받자 오히려 당황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졌다. 여자 역시 말없이 남자의 숨소리를 듣고만 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전화 안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을 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어떻게 지냈어요?"


남자는 태국 출장에서 막 돌아왔고 술도 마시지 않은 멀쩡한 정신이었으며 여자가 받을 거라는 기대 없이 처음으로 페북 메신저를 사용해 본 거였다. 안부 정도의 인사와 여자의 귀국 날짜에 대한 문답이 오갔다. 여자는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하고 일방적으로 끊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용'이라는 말을 한 순간부터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부정되었으므로 남자를 떠났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지랄 맞아서 사랑을 부정당하고도 감정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망치듯이 호주로 떠나왔고 남은 감정을 정리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었다.


여자가 1년 간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 달이 지났을 때, 페이스북 메신저로 남자가 연락을 했다.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남자가 호주에 있는 여자에게 처음으로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해왔을 때 수신을 누르는 순간부터 여자는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기 며칠 전이었고 수신을 누른 것은 여자의 선택이었다. 거절을 누르거나 안 받을 수도 있었다.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여자가 남자를 1년 만에 만났을 때 한 말이다. 남자가 술에 취해서 전화를 걸어 배설하듯이 뱉어낸 말들 역시 되돌려줬다. 남자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며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과 행동이 부끄럽다고 했다. 여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고 상처를 주었으니 만나지 못할 것 같다며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거나 섹스를 한 것과는 무관하다. 어떤 체위로 섹스를 했으며 여자와 했던 체위를 다른 여자와 시도한 일과도 무관하다. 그 말을 듣고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맞지만, 남자를 잊기 위해 죽도록 괴로웠던 건 맞지만 남자가 다른 인연을 찾아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 것도 사실이어서 그것 역시 무관하다. 남자는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을 듣고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했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여자의 사랑을 '이용'이라고 생각한 남자의 사고였다.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용서하지 마세요."


여자가 남자를 이용했다는 생각은 변함없다는 뜻이었고 지나간 시간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하는 대답이었다. 여자는 1년 만에 만난 남자를 혼자 두고 카페를 나왔다. 여전히 감정이 남아있어 정리가 안 되었는데 남자를 만나고 나니 정리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감정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을 부정당하고도 남아있는 감정에 허덕였던 날들이여 안녕!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남자를 만나서는 문제적 상담자들의 모든 행태를 보여왔던 여자의 언행들, 태어나서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는 여자가 남자와는 격렬하게 싸우고 또 싸우던 날들이여 안녕. 기억에 없다는 남자의 부정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던 날들도 안녕. 무엇보다 자신보다 남자를 더 사랑했던 날들도 안녕. 이제 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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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1년 만에 와보는 카페에 들어서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자와 남자의 아지트 같은 곳이자 추억의 장소였다.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매혹되었던 목소리와 웃는 얼굴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여자는 먼저 와있었다. 남자는 항상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편이었고 여자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그사이 여자는 긴 머리에서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로 머리 모양이 바뀌었다. 여자가 한국에 돌아온 것을 알고 있었고 만나고 싶었지만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여자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만나고 싶었는지 마음속에 있는 말은 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뭔가 달랐다. 분명 웃고 있는데 냉기가 느껴진달까. 여자가 감정을 뺀 건조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했다.


"당신은 발정 난 개새끼 마냥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면서 붙어먹다가 잘 안 됐다며 나에게 징징댔고 보고 싶다고 했어요. 내 덕분에 젊은 여자와 섹스를 해봤다고 보고를 하더군요. 성격이 무척 좋은 젊은 분과 가졌던 체위와 섹스의 장면을 신이 나서 묘사하면서 나와는 인연이 완전히 끝났다고 했어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으니 다신 나를 보지 못할 거라고... 그러더니 보름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 젊은 분과는 너무 맞지 않는다고, 나와 비교된다면서 궁합이 안 맞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끝냈다고... 횡설수설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젊은 분이 다른 남자들과 자고 다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당신이 그만둔 거였어요. 그걸 알게 된 당신에게 쿨하게 넘어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면서. 불과 2주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당신은 배설하듯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당신의 배설물을 뒤집어쓴 나는 어땠을까요?"


남자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여자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전혀 없지만 여자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외에 무슨 말로 여자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무엇이든 다 사실일 것이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후에 여자가 카톡을 차단해서 더 이상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로 기억하지도 못할 말들을 지껄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거기까지만 알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여자가 차단하지 않았다면 테이팅 앱으로 만난 여자들과 소개팅으로 만나 몇 달 사귄 연상녀와의 일도 자신의 입으로 다 까발렸을 테니 말이다. 남자가 여자를 잊기 위해 만난 사람들은 오히려 여자를 더 생각나게 했고 여자만큼 남자를 사랑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시간일 뿐이었다. 사실 그중에 누구와 잘 됐다면 여자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겠지. 여자 앞에서 발가벗긴 채로 내동댕이 처진 기분이다.


여자는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용서하지 말라고 답했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카페를 나갔다. 남자는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을 후회했다. 예전의 불륜 관계로 돌아가기는 싫고 친구보다 우위에 있는 관계는 유지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될 수도 없게 되었다. 남자는 기억에도 없는 말들과 여자에게 준 상처를 생각하면 부끄러웠다. 오직 여자만을 원했고 여자와 남은 인생을 같이 하고 싶었으나 여자가 거부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와 인연을 끊고 다른 인연을 찾은 것뿐이다. 본질적인 원인은 거기에 있다. 여자와 자주 싸웠던 이유도, 이별을 하게 된 이유도 같았다.


남자는 마리아 칼라스 음반을 틀었다. 여자가 기분이 울적할 때 듣던 곡이다. 여자가 곁에 없다는 것에 가슴이 미어진다. 다시는 여자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절망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손으로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이별을 하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지만 이제는 정말 끝났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참담하다. 세상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남자를 비추던 햇빛, 빰을 스치던 바람, 음식 냄새, 웃음소리... 남자도 없어지고 있었다.


여자가 있는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었다. 태국 법인으로 출장 갈 날만 기다렸다. 여자가 호주에 가있는 동안 태국 출장은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방콕에 3개월을 머물면서 조이에게 연락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여자를 잊기 위해 여러 여자를 만나봤지만 여자라는 동물에 환멸만 남은 때였고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는 3년간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조이를 배신해 놓고 이제 와서 연락을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방콕 시내에서 회식을 하거나 어학원 근처에 갈 일이 있을 때면 조이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남자는 이번 출장에서 조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조이, 김 선생의 존재 때문에 여자와 숱하게 싸우고 난 뒤에 조이와 연락을 주고받는 라인을 삭제했었다. 남자는 라인 앱을 다시 설치했다.


--잘 지냈어요? 너무 오랜만이죠.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조이의 답장은 하루가 지나서야 왔다.


--오빠, 반가워요. 보고 싶어요. 방콕에 있어요?


남자는 조이의 답장이 반갑고 고마워서 빠른 손놀림으로 문자를 보냈다.


--조이는 아직 어학원에 있어요?


--조이 어학원에 없어요. 조이 결혼했어요.


--축하해요.


남자는 여자와 불륜으로 만나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여자와 인연을 끊어냈는데 조이가 결혼을 했다면 만날 이유가 없었다. 불륜 관계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남들은 짝을 잘도 찾아서 연애하고 결혼을 하는데 남자는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한국도 태국도 다 싫어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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