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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12-맘정, 몸정, 밥정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2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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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평온한 일상이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왔다. 남자를 만나 죽도록 사랑하고 죽어라 싸우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 완전한 결별이 가져다준 평화였다. 아직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보고 싶은 날이 있지만 남자의 배신 덕분에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여자가 호주에서 1년을 보내는 기간도 이별의 시간이었으나 남자를 잊기 위해 발악을 해야 했고 감정을 누르지 못해 몸부림치던 날이었다. 서로를 잊기 위해 여자는 호주로 떠났고 남자는 다른 인연을 만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이별을 자각하려고 애썼다.


여자는 남자가 늘 하던 말을 떠올렸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해야죠."


여자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언제든 간다는 남자에게 인생을 걸 순 없어. 언제든 등을 돌리고 배신할 수 있는 사람에게 뭘 믿고... 신뢰가 전혀 없는데... 사랑에 목숨 거는 남자라면 한 번뿐인 인생, 그에게 가고 싶다.'


언젠가부터 남자가 하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똑같은 말이 반복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죽어라 싸우며 지내온 연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물어뜯었다.


남자는 근본적인 원인이 여자가 결혼한 유부녀라는 것이므로 이혼을 하고 남자에게 오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문제나 싸움도 없어진다고 열변을 토했다. 모든 원인은 여자가 남자에게 오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그런 기회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원인 제공은 여자가 했다는 주장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남자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갈 생각을 하는 남자에게 신뢰는 없다. 남자가 이것저것 재거나 따지지 않고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이었다면 가고 싶다는 논리였다.


남자는 다른 인연에 대한 여지를 남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자가 남자에게 오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소리치고,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인연을 여지로 두는 남자를 신뢰할 수 없어서 못 간다고 소리치고


여자와 남자는 평행선이었다. 매번 반복되는 싸움이었다.


결국 남자가 다른 인연을 만나기 위해 여자와의 인연을 끊어내는 것으로 끝을 냈다. 1년여의 이별과 이별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견뎠다.


호주에서 1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여자는 일과 공부에 전념했다. 코로나 시대는 사랑에 빠져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남자에게 향하는 감정 속에서 울고 웃고 싸웠다. 이제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끝났다. 여자는 자신의 본래 자리에서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지도교수님이 운영하는 심리상담연구소에서 일을 하면서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아들은 호주 유학 중이라 집에 케어할 아이가 없었고 남편은 여자의 일과 공부에 전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사이 여자는 40세를 맞이했다.


그날도 여자는 연구소에 남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료를 찾다가 예고편으로 올라온 영화 '마리아 칼라스'를 보게 되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아리아 <어느 개인 날>이 흘러나왔다. 어느 개인 날에... 마리아 칼라스의 처연한 목소리는 여자를 기억 저편으로 데려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남자의 집에서 마리아 칼라스 음반을 듣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에 듣는 <어느 개인 날>의 정조는 더욱 슬프다.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겨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나비부인이 꼭 죽어야 했을까?"


여자는 남자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어 안기며 대답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일 수도 있지."


"당신은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어요?"


여자는 남자의 팔을 풀어내고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여자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빛났고 사랑의 열병에 빠진 여자의 몸 전체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남자는 두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와 빗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몸에 빠져들었고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도, 빗소리도 듣지 못했다. 남자는 그날도 여자의 몸에 피멍을 잔뜩 냈다. 왼쪽 가슴은 피멍으로 뒤덮였고 등과 허벅지에도 까맣고 노란 멍이 들었다. 남자는 멍투성이가 된 여자의 몸을 보고야 안심했다.


"당신은 내 거야."

"이미 당신 거예요."

"내 거면 나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이랑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나는 당신과 같이 살고 싶다고요. 당신이 내 부인이 돼서 같이..."


여자는 남자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마리아 칼라스 음반을 들으며 나눴던 사랑도, 속삭임도 그리웠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감정이 사라질까. 사랑했던 시간과 추억과 상처는 남는다 쳐도 감정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감정의 지옥에서 빠져나오긴 했으나 남아있는 감정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남자와 음악을 들으며 마시던 맥주, 맥주를 넘길 때 목젖이 섹시했던 남자, 다정한 목소리, 여자의 얼굴을 감싸던 손길, 잡아먹을 듯한 열정적인 눈빛... 여자는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노트북을 정리하고 책과 자료를 챙겨서 연구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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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태국 출장을 끝내고 한국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베트남으로 갔다. 여자가 호주에 있을 때는 찾아가거나 만날 수 없었지만 한국에 있는 이상 만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여자가 있는 한국에 가기가 두렵다. 여자와 같이 오기로 했었던 싸파에 혼자 왔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베트남 싸파 트레킹을 예약했다. 싸파에 도착하자 밤새 내린 비로 트레킹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메일을 받았다. 싸파는 안개에 휩싸인 회색빛이었다. 여자와 같이 오기로 한 사파는 초록빛이 넘실대는 계단형 논과 나무가 펼쳐진 곳이었는데 남자가 혼자온 사파는 마을의 모습까지 잡아 삼킨 안개도시였다.


트레킹은 취소되었다. 서서히 비는 그치고 있었으나 길이 미끄러워서 트레킹은 무리라고 했다. 하루가 온전히 비어버렸다. 태국법인 출장을 마무리하면서 무리를 해서인지 몸이 으실거리고 한기가 올라왔다. 호텔 내에 있는 사우나와 마사지를 예약했다. 편백나무통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몸살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마시지를 받고 사우나를 했더니 몸이 개운해졌다. 상쾌해진 기분으로 안개에 싸인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여자와 같이 인증샷을 찍으려고 했던 사파역, 선플라자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길 건너편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 건물은 안갯속에 감춰진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다. 실제 성당 크기는 거대하지 않았는데 안개에 휩싸인 노트르담 성당은 음산해 보였다.


남자는 갑작스러운 오한이 찾아와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콧물까지 나기 시작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타이레놀을 받아 들고 방으로 돌아와서 누웠다. 겉옷을 하나 더 껴입고 이불을 뒤집어썼는데도 몸이 떨렸다. 약을 먹고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오한은 가셨는데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팠다. 내일 아침에 트레킹이 가능하다는 메일이 왔다. 몸 상태가 좋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오후가 되자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이 질척해서 이탈리아 남자와 프랑스 여자가 한 번씩 미끄러졌다. 원주민 아이들이 트레킹 중간부터 따라붙어서 내리막길에서 손을 잡아주거나 풀피리를 불기도 했다. 직접 만든 팔찌와 가방 등을 잔뜩 달고 와서 팔기 위한 작전인 걸 모두가 알지만 사파의 자연과 아이들의 원색적인 복장은 잘 어울렸다. 남자는 안개가 걷힌 싸파를 걷고 있는데도 안갯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가 쨍하게 나자 환호를 지르는 스페인 커플을 보면서 머릿속이 울렸다. 귀에 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트레킹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타이레놀 2알을 먹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오한은 멎었는데 왼쪽 귀가 이상했다.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아, 아 소리를 내보고 한쪽 귀를 막았다가 다시 여는 동작을 수차레 해봤지만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했다. 귀가 안 들리니 몸의 중심도 안 잡히고 머릿속에 안개가 들어찬 느낌이었다. 정상에서 벗어난 불쾌한 상태...

남자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과 같이 오고 싶었던 싸파에 왔어요. 몸이 좀 아파요. 혹시...


여자처럼 남자를 사랑해 준 사람은 없었다. 남자 역시 여자만큼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끼리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다. 여자는 왜 자신의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걸까?


--스텐스는 아직 그대로 인가요? 바뀔 여지는 없나요?


한쪽 귀가 안 들리는 상태인데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맨 몸에 앞치마만 두른 채 남자에게 달려와 안기던 여자의 살결과 그날의 음식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맘정, 몸정, 밥정까지 완벽하게 길들여놓은 여자가 밉다.

-- 내가 졌어요. 내일 갈게요.


남자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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