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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14-감정훈련과 감정제거 사이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4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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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준비로 밤을 새운 여자는 눈이 무겁다. 머리도 멍한 상태지만 마음은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동반된 각성상태이다. 스터디는 일주일에 한 번 하고 있는데 이번 달은 필립 플로레스의 <애착장애로서의 중독>을 각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현장 실습과 이론을 비교하고 있다. 여자는 논문 주제를 '애착장애'로 잡았기 때문에 더 공을 들여 발표 준비를 했다. 논문을 찾아보고 서양의 이론이 한국적인 상황에서 적절한지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스터디 장소는 여자가 다니는 심리상담연구소에서 한다. 교수님께 양해를 얻어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이용하고 있다. 스터디에 참여한 인원 중 대부분은 전공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인 반면, 여자는 현직에 있으면서 전공 공부를 하는 경우라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공개사례발표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상담심리세미나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시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지금이 여자는 평온하다.


남자를 만나면서 죽도록 사랑하고 죽어라 싸웠던 감정을 다른 에너지로 전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자신에게 마음껏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홀가분했다.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완전히 소모하고, 물론 그 감정은 여자의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주기도 했지만 여자가 선택하고 열렬하게 매진한 감정이었다. 후회 없이 사랑했고 원 없이 싸웠으니 더 할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이 소진되었다. 이제 남자에게로 향하던 감정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어, 물론 그 에너지 역시 여자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 여자의 에너지였지만 남자와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은 자신에게 에너지를 쓸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다. 특히 결핍이 전제된 사랑은 욕망을 극대화시키기에 더욱 격정적일 수밖에 없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갖지 못한다는 결핍 때문에 미친 듯이 사랑했고 미친 듯이 싸웠다. 그 모든 것이 끝난 지금, 감정조차 희미해져 가는 지금이 편하다. 몇 년에 걸쳐 이별과 재회를 거듭했지만 의도를 가진 인연 끊기와 그 후에 보인 남자의 언행은 여자의 감정을 정리하는데 일조했다. 반복은 감정훈련이 되었고 배신은 감정제거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다.


여자는 심리분석을 하면서 남자를 자주 떠올린다. 특히 애착외상과 연결이 되곤 하는데 남자 역시 애착외상을 입은 사람이라 성장이 멈춘 내면아이가 성인을 압도해 버리는 상황이 자주 일어났다. 여자는 남자가 보이는 언행에 대해 유아틱 하다거나 유아틱 한 발상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애착외상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자는 상담자로서의 역할은 집어던지고 연인 역할에만 집중한 결과 싸우고 또 싸우게 되었다. 사랑에 눈이 멀면 거리 두기가 쉽지 않다. 서로에게 중독된 상태에서 똑같은 실수, 충동적 결정이 반복되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다가 끝이 나는 구조.


스터디를 끝내고 사람들이 뒤풀이 장소로 이동할 때 여자는 연구소 뒷정리며 문단속을 핑계로 뒤로 빠졌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후배에게 뒤풀이에 가지 못한다는 문자를 보내고 연구소를 나왔다. 밤샘 후유증으로 운전이 힘들 것 같아 차를 두고 왔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감싸 안은 연인들이 지나갔다. 전철에 자리가 없어 무거운 눈을 감고 창에 기대어 서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페북메신저가 도착했다는 알림... 남자였다.


-선배 문상을 다녀오는 중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인데, 지난달 22일에 죽었답니다.

-예전에 이혼했고, 아이는 없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을 보는 것은...

-상주도 없는 장례식은 처음인 듯싶습니다


여자가 호주에 가있었던 기간부터 현재까지 이별의 시간이 2년 가까이 돼가는데 남자가 뜬금없이 5개월 전에 '제가 졌어요. 내일 갈게요' 문자를 보내고 다음 날 연락도 없었다. 이틀 후에 '미안해요'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장례식에 문상을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겠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사람,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 앞에서 미래의 자신을 마주한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남자. 안 됐다. 여자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참 안 됐다.


거기까지만 생각하자는 여자의 마음과 달리 지하철 유리창에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장례식장에 다녀온 날이었다. 남자는 장례식장에서 나오면서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서 만나요. 꼭 봐야겠어요. 여자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상황이었고 그걸 알고 있는 남자가 저런 식으로 무리하게 요청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다고 둘러대고 남자의 집으로 갔다. 남자는 먼저 와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자에게 남자가 덤벼들었다. 여자를 으스러지게 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여자의 옷을 거칠게 벗기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흥분한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아플 정도로 물고 빨고 비틀었다. 여자도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충혈된 눈과 표정은 고통과 쾌락이 공존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고 간 듯한 광폭한 섹스가 끝났다. 남자는 여자를 안으며 흐느끼듯 말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남자는 죽은 자의 장례식장에 가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진다고 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행위가 섹스였고 그때의 섹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불태워버리는 과격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섹스였다. 여자는 남자를 꼭 안아주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어린아이가 품에 안겼다.


지하철 안내방송이 여자의 집에 다 왔다는 것을 알렸다. 지하철 유리창에 안고 있는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다시 한번 남자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문자에 답을 하거나 반응을 하지는 않았지만 페북메신저를 차단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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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머릿속을 휘젓는 말, 맘정, 몸정, 밥정... 맘정, 몸정, 밥정...

여자가 처음 이 말을 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거니와 와닿지 않았다. 새로운 단어를 받아들이는 수준으로 어느 정도 공감하는 신선한 단어였다. 여자와 헤어져 있는 동안 이 단어가 지독하게 따라붙었다. 저 3가지 정을 떼는 것이 힘들겠구나. 아니 뗄 수가 없겠구나! 특히 다른 여자들을 만났을 때 심했다. 여자처럼 마음과 몸과 밥이 맞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런 정이 생기기도 전에 끝이나 버렸다.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여자들 뿐이었다. 여자와 헤어져도 여자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사실은 여자가 만들어준 자신감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맘정과 몸정까지는 남자도 경험해 봤지만 밥정은 여자가 처음이었다. 여자와 밥을 같이 먹은 횟수가 가족보다 많았다. 여자와 함께한 시간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준 음식은 어머니나 전처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정성이었다. 언제나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고 가끔 처음 보는 음식을 내오기도 했다. 반찬을 만들 때는 간을 보라면서 입에 넣어주고 찌개나 국을 끓일 때도 수저에 국물을 떠서 후후 불어서는 맛을 보게 했다. 짠 음식을 싫어하는 남자를 위해 간이 세지 않게 신경을 썼다. 남자도 여자를 도와 채소나 고기 손질을 하면서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여자는 마술을 부리듯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어 한상 가득 차렸다. 그리고는 사극톤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하, 수라를 드시지요. 소인이 기미를 해드리겠사옵니다. "


여자는 젓가락으로 메인 요리를 집어서 자신의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남자는 웃음이 터졌다. 여자는 여전히 사극톤으로 "전하, 용안이 일그러지십니다. 진정하시고 수라를 드시지요."라고 말하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여자가 활짝 웃는 모습과 웃음소리 속에 맛있는 음식이 있는 집. 자신이 왕이 되는 집. 여자와 있으면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있는 안정감이 들었다. 여자와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여자와 부부가 되고 싶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5개월 전에 베트남 싸파에서 여자에게 간다는 문자를 보내고 가지 못한 이후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남자가 보낸 문자가 더 있었다. 지난달 선배 장례식장에서 충격을 받고나와 여자에게 보낸 문자였다.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뜯어도 모르겠어서, 자신이 한 짓이 부끄러워서, 여자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뭐든 다 미안해서... 남자는 미안해요라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여자는 페북메신저로 보내는 문자에 답을 하지 않지만 읽기는 한다.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남자는 회사 동료와 술자리에서 '사는 게 재미없다'라고 푸념을 했다. 일상은 똑같이 돌아가는데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고 웃을 일이 없다. 동료는 연애를 해보라고 한다. 연애라... 그게 맘대로 안 되대. 남들은 짝을 잘만 찾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데 나는 뭐가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남자는 오랜만에 과음을 했다. 만취 상태에서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늘어놓고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냈으면서 다음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날이 다시 오게 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 더 이상 부끄러운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술자리에서는 적당량만 마시고 조심했다. 그러나 집에 가서 긴장이 풀린 상태로 혼자 마시다가 식탁에 남은 칼자국을 보면 조절 능력을 잃어버렸다. 여자가 남자를 떠난 결정적인 이유가 된 '이용'이라는 말이 칼자국마다 찍혀있는 것 같았다. 여자에게 '이용'이라는 말을 철회한다고 해볼까?


회사에 출근하고 점심시간에 핸드폰 확인을 해보니 어젯밤에 여자와 페북통화를 한 내용이 떠있다. 술에 취해 1시간 넘게 통화를 했는데 남자는 전혀 기억에 없다. 또 어떤 실언을 했을지 겁이 났다. 통화 종료 후에도 계속 전화를 걸어 거절된 횟수가 7번이었다. 마지막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 당신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당신이 그걸 차단해 버리는 느낌이에요. 난 당신 없이는 안 되겠어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당신이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당신에게 부끄러운 짓 안 했어요. 당신은 안 믿겠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내일 갈게요.


남자는 술김에 여자에게 간다고 한 것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여자에게 만나자는 말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번에는 꼭 여자에게 가야지. 지난번에 가지 못한 이유도 이야기해야지. 여자는 분명 남자가 아파서 못 갔다고 하면 오해를 풀고 걱정을 해주겠지. 설핏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이별의 기간이 너무 길었다. 이렇게 긴 시간 헤어져있었던 적이 없었다. 남자는 자꾸 시계를 본다. 5분 전에 보고 또 시계를 보고 있다. 좀 일찍 나가야겠다. 여자가 근무하는 연구소는 시내에 있어서 차가 막히니까 지금 나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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