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5화
XX15
-내일 갈게요
남자는 5개월 전에도 똑같은 문자를 보냈다. 온다는 날에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없다가 다음날 '미안해요' 문자가 다였다. 여자와 남자가 헤어진 지 2년이 넘었다. 그사이 딱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여자가 호주에서 1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지랄 맞게 남은 감정에 이끌려 만났다가 여전히 여자의 사랑을 '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변함이 없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남은 감정이 정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여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 사랑놀음에 젖어 뒤로 밀쳐놓았던 일과 학업에 집중했다. 남자에게 향하는 에너지가 여자 자신으로 향하자 감정소모에 시간을 죽이던 날은 새로운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한마디로 여자는 남자가 빠진 인생을 잘 살고 있다.
-내일 갈게요
여자는 남자가 보낸 문자를 읽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대견하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다시는 예전과 같은 감정과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결론은 변함이 없다. 돌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어찌됐든 여자가 선택하고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이용'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같이한 모든 시간이 불륜일 뿐 사랑이 아니라고 남자가 부정하지 않았다면, 여자와 인연을 끊어내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간 남자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 붙어먹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내일 갈게요 라는 문자를 보낸 남자가 여자에게 왔다면 달라졌을까? 여자는 코웃음이 났다.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내용만 달라질 뿐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헤어지는 행위를 반복하게 될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인연이 이어진다면 다시는 인연을 잘라내기 어려울 거라는 불온한 생각이 들자 여자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목신의 오후에서 기다릴게요
남자가 연구소 근처 카페에서 기다린다는 문자를 보냈다. 여자의 가슴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명 내일 갈게요 라는 문자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고 감정 동요도 없었다. 남자가 여자 가까이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여자의 심장과 맥박은 빨라졌고 얼굴은 뜨거워졌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흔들리지 않기는 개뿔!
남자는 등을 둥글게 말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자가 다가가자 보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긴장한 어깨와 경직된 얼굴 근육으로 인해 미소는 어색했다. 남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자를 맞이하면서 말했다.
"오늘 시간이 괜찮아요?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자는 심장이 꼬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안 나왔다. 남자는 여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공부 시작했다고... 잘하셨어요. 당신은 잘할 거예요."
-미친... 당. 신.이라는 말이 나와?
"지난번에... 간다고 하고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많이 아팠어요."
-약속은 원래 잘 안 지켰어. 가끔은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왔지만 대부분은 약속 시간에 늦었고, 늦잠 자느라 약속 시간을 코앞에 두고 샤워를 하거나 교통 상황을 초단위로 재는데 시간을 할여하느라 준비 시간이 늘어나고, 갑자기 화장실 바닥에 낀 물때가 보이거나 빨랫감이 보여서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느라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잖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잠이지. 잠을 자느라... 에효, 지난번에도 그래서 못 왔을 걸!
"싸파에 갔었어요. 당신과 같이 가고 싶었던 곳인데... 거기서 당신에게 간다고 문자를 보낸 거였어요."
-결국 안 왔잖아. 그것도 2년 가까이 헤어져있던 상태에서 그런 문자를 보내는 것도 미친 짓인데 나타나지도 않았고 다음날 미안하다는 문자가 끝이었지.
"당신을 만나려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약을 먹고 잠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다음날이었어요."
-그랬겠지... 그놈의 잠... 잠 때문에 많이도 싸웠지.
"미안해요. 감기 몸살에 중이염까지 겹쳐서 정신을 잃었어요."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잠을 잔 거지.
여자는 마음속 말을 접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5개월 전에 보낸 문자에 '내가 졌어요 내일 갈게요'라고 했는데 졌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남자는 어느새 축축해진 손을 비볐다. 답을 하기까지 한참 걸렸다.
"사실은 당신과 내가 밀당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존심 싸움하느라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더 강했고 제가 진 거죠."
"이보세요. 불륜 관계가 싫다고 다른 인연 찾아가서 실컷 재미보다 온 사람 입에서 밀당이니 자존심 싸움이니 하는 말이 나와요?. 더구나 졌다니요? 본인이 인연 끊고 할 짓 안 할 짓 다 하고 다녀놓고 무슨 말이에요?"
"맞아요. 다 맞는데요. 근본적인 원인은 당신이 나한테 안 온다고 해서 생긴 일이에요. 혼자 늙어 죽기는 싫거든요. 당신을 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만나야 했어요.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은 없었어요.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생각이 더 났어요.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3개월가량 사귄 사람이 있어요. 부장의 소개로 만나게 된 분인데 학벌과 직업이 분명하고 문화적 취향도 맞는 것 같아서 자주 만나 밥을 먹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맹한 사람인 걸 알게 됐어요. 그래도 혼자 사는 건 끔찍하게 싫으니 맞추며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어느 날 화를 내면서 가고는 끝났어요. 전 아직도 그분이 왜 화가 났는지 몰라요."
"그걸로 끝이었어요? 당신이 연락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연락하지 않았나요?"
"여러번 연락했죠. 그런데 연락을 받지 않길래 나 싫다는 사람 잡고 싶지 않아서 차단했어요."
여자는 자신이 남자에게 당. 신.이라고 부른 것도 모른 채 머릿속에서 날짜를 계산해 봤다. 남자는 3개월가량 누군가와 사귀는 동안에는 여자에게 연락이 없다가 그분과 깨지고 나서 페톡메진저로 여자에게 연락을 한 거였다. 여자와 헤어졌을 때마다 김 선생에게 연락했던 것처럼... 여자는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사귄 분이 왜 화를 냈을지 짐작도 갔다. 남자는 분명 자기가 그랬을 리가 없다거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거나, 기억에 없다고 하면서 소리를 높였을 테고 상대방은 명확한 사실 앞에서 아니라고 우기는 남자에게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여자 역시 남자를 만나면서 그것 때문에 몇 년을 싸웠다. 싸움이 반복되면서 남자가 정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이별과 재회 또한 반복되었다.
남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말했다.
"당신처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당신처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당신과 비교가 됐어요. 3개월 사귄 분과는 잠자리도 맞지 않았어요. 오죽하면 그것도 맞지 않는 사람과 살아보려고 했겠어요.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당신인데 당신은 나한테 안 온다니 다른 인연을 찾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안 됐어요."
"잘 됐으면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겠죠."
'나는 당신과 잘 되고 싶어요. 같이 살지 못해도 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관계면 더 좋고요."
"그런 관계가 싫어서 다른 인연을 찾아 붙어먹다가 왔으니 이제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요."
"또 옛날이야기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옛날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보고 싶었고 만나서 얼굴 보니 좋아요. "
"좋아요? 좋군요... 그래서요?"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단지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네, 봤으니 됐네요. 저는 잘 살고 있으니 당신도 잘 살아요.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화내지 말고 약속 잘 키키고 가끔은 선물도 하시고 기억하지도 못할 말은 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원하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남자의 얼굴은 거부할 수 없는 열병에 들뜬 상태로 붉게 물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외면하고 나왔어야 했다.
XY15
목신의 오후에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는데 막상 나타나자 놀랐다. 신기하게도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몸이 반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여자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몸이 기억했다. 목신의 오후에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손으로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남자와 맞는 사람은 역시 여자라고 몸이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여자는 일어나서 나갈 태세다. 남자는 그동안 여자에게 자신의 연애담을 떠벌였던 것과 여자에게 간다고 문자만 보내고 가지 못한 것이 창피하고 면목없고 할 말이 없지만 여자를 잡아야 했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요.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그런데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
남자는 여자가 동요하는 눈빛을 보았다. 여자는 남자가 혼자 밥을 먹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여자와는 처음 와봤다. 여자가 서양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늘 여자는 남자가 좋아하는 한식을 택했었다. 여자가 남자를 배려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날들이었다. 여자를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연인 세트'를 시키자 여자가 코웃음 소리를 냈다. 이전에 활짝 웃던 모습과는 달랐다.
"헤어지니까 이런 데를 와보네요."
"미안해요. 당신이 좋아한다고 얘기했는데 잊어버렸어요."
남자는 여자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말실수한 것을 알아챘다. 다행히 주문한 와인이 나왔다. 와인 덕분에 최근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남자는 한 달 뒤에 태국법인 출장이 잡혀있다는 말끝에 지난번 출장 때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이 호주에서 돌아와서 딱 한 번 만났을 때, 당신 말을 듣고 창피했어요. 많이 미안했고...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 때문에 당신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요.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당신에게 연락을 할 염치가 없었어요. 그러다 출장을 가게 됐는데... 태국에 있는 3개월 동안 김 선생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만나적도 없어요. 당신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난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당신에게 부끄러운 일은 없었어요."
여자는 소리 내서 웃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와인이 묻어있는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나랑 헤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을 만나든 붙어먹든 당신이 할바죠. 다만 발정 난 개새끼처럼 붙어먹은 이야기를 고주알미주알 나에게 일러바친 건 유아틱 하죠. 다른 여자 궁둥이 쫓아다니면서 붙어먹은 이야기를 전 연인에게 하는 심리는 뭘까요?
남자도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답했다.
"당신을 자극하려고 했겠죠. 당신을 나에게 오게 하려는 작전이라고 착각한 걸 거예요.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었어요."
와인을 2 병 째 마실 때쯤 남자는 여자가 웃는 모습을 봤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여자는 4학기에 접어들어서 논문 지도 과정까지 수강하느라 시간을 쪼개면서 살고 있었다. 방학 때는 설문과 인터뷰까지 진행해야 해서 잠잘 시간을 줄여가며 준비하고 있단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학업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며 멋진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여자가 시계를 보는 것을 보자 불안해졌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다. 지금 가게 둘 순 없다.
"집에 가서 한잔 더 할래요? 보여줄 것도 있고..."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눈빛은 이미 동요하고 있는데 거부의 몸짓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보낼 수가 없다. 이대로 보내면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돌아갈지 모른다.
"어려운 부탁인 거 아는데요, 우리 집에 같이 가요, "
여자는 눈이 일렁이며 붉어졌다.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싶은 걸 참았다. 남자는 현관 앞에서 여자가 보이게 숫자를 천천히 눌렀다. 여자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 바꿨던 비밀번호는 다시 여자의 생일로 바꾼 지 오래전이다. 집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식탁에 남은 칼자국이었다. 여자는 식탁에 앉아 칼자국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남자는 예전에 마시던 커플 잔과 맥주를 꺼내왔다. 잔에 맥주를 따르고 습관적으로 부딪쳤다. 여자는 보여줄 게 뭔지 물었다. 남자는 책장으로 가서 여자와 남자의 첫 경험 연애사 목록이 적힌 노트를 꺼내왔다. 식탁에 칼자국을 남기며 칼부림이 있었던 날, 남자가 쓴 내용을 여자에게 보여줬다. 여자가 보지 못한 내용이었고 남자가 '이용'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한 후회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남자의 마음을 여자에게 알리고 싶었다. 여자의 제안으로 시작한 목록 쓰기였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처음 해보는 일들을 적어 내려간 두 사람만의 유희였다. 남자는 57번까지 썼고 여자는 60개를 썼다. 여자는 목록 하나를 추가했다.
61. 파렴치한을 다시 만나다.
남자는 움찔했지만 여자가 목록을 썼다는 것은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남자는 신나서 싸파에서 찍은 사진을 여자에게 보여주면서 여자와 다시 같이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 핸드폰 상단에 카톡이 떴다.
-크리스티나예요. 얼굴보면서 통화할까욤?
남자는 당황했다. 크리스티나?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여자가 핸드폰을 가져가서 카톡을 열었다.
-반가워요. 뭐라고 부를까요? 똑똑하시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 뭐 해용?
-반갑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카페에 있어요.
-아공,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용.
여자는 핸드폰을 남자에게 돌려주면서 아까 카페에서 고개 숙여서 핸드폰을 본 게 이것 때문이었냐고 물었다.
남자는 당황해서 말이 잘려 나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버벅거리는 자신이 한심하다.
"전에 깔았던 소개팅 앱인데... 탈퇴한다고 했더니... 갑자기... 여러 명에게서 메시지가 왔어요."
여자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굳어서 딱딱하다. 남자는 웃음이 사라진 여자의 얼굴이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나랑 만나기로 한 시간에 소개팅앱 여자랑 카톡을 한 거네요."
"카톡이 와서 답을 한 거뿐이에요. 이미 탈퇴했고 앱도 삭제했어요."
"이런 수준의 여자들을 만난 거였어요? 짝짓기 앱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조심하세요. 프로필 90%는 가짜래요. 더불어 문란하니 성병도 주의해야 해요. 탈퇴하고 재가입하기를 반복하면서 돌아가며 섹스한다는데, 그런 곳에 당신이... 믿고 싶지 않네요.
"그만하세요.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3명을 만나봤지만 아니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곳에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탈퇴한다고 글을 올렸더니 몇 명에게서 메시지가 와서 답을 한 것뿐이에요."
남자는 핸드폰을 보여주며 앱이 삭제되어 없는 것을 여자에게 확인시켰다.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첫 경험 목록을 쓴 공책을 찢으려고 했다. 잘 안 찢어지자 여자는 가스레인지를 켜서 불을 붙였다. 남자는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귀퉁이가 까맣게 탄 공책을 싱크대에서 털어냈다. 여자는 분이 안 풀리는지 숨소리가 컸다.
" 또 우리 시간을 모욕하는군요. 어떻게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에 소개팅 앱 여자랑 문자를 주고받아요? 이
따위 목록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공책인데... 없애요."
남자는 여자가 호주로 떠나기 전에 칼부림이 났던 식탁을 보면서 자칫하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게 했다가 화재로 번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다. 여자가 흥분하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 여자가 보는 앞에서 목록을 쓴 노트를 뜯어내서 라이터로 태웠다. 한 장이 화르륵 타오르자 여자의 눈물이 떨어졌다. 또 한 장이 타오르자 여자가 울었다. 마지막 한 장이 탈 때는 욕을 했다. 나쁜 새끼...
남자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여자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온 카톡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것이다. 크리스티나라는 이름도 기억에 없다. 다만 소개팅앱에 탈퇴글을 올리자 연락이 온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형식적인 답을 한 것뿐이었다. 약속이 있어서 카페에 있다고 답을 한 게 다였다. 소개팅 앱은 이미 탈퇴했고 삭제했는데 무슨 문젯거리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칼자국이 남은 하얀 식탁 위에 공책이 타고 남은 재가 내려앉았다. 여자는 비어있는 눈으로 재를 좇으며 말했다.
"우리 역사가 재가 되었네요. 모욕을 당하고..."
"무슨 모욕을 당했다고 그래요. 소중한 기록은 왜 없애라고 하고..."
"소중해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줄 몰랐네요. 우리 역사가 타서 없어졌으니 소개팅앱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죠."
"몇 번을 말해요. 소개팅앱은 탈퇴하고 앱도 삭제했다고 했잖아요. 오늘 카톡이 와서 인사로 답을 한 것뿐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 믿으시는 거죠?
"카톡에 답을 했다는 것은 호감을 표시한 거고 그렇게 만남을 가져볼 마음이 있었던 거?"
남자는 휴대폰을 열어 크리스티나 프로필을 보여줬다.
"보세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인가요? 아니잖아요."
남자는 여자가 보는 앞에서 크리스티나 카톡을 차단했다. 재수 없는 크리스티나. 여자도 남자의 페북메신저를 남자가 보는 앞에서 차단했다. 안 돼... 남자는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조급해졌다. 여자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사라졌다. 남자는 그렇게 둘 수 없다. 여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로 살아갈 수가 없다. 남자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