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6화
XX16
여자와 남자의 역사가 재로 변했다. 5년에 걸쳐 처음 해보는 것들을 적어 내려간 연애사 목록이 한순간에 재로 사라졌다. 여자와 남자만이 알 수 있는 사소하지만 내밀하고 스릴 있는 사건과 행동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던 그야말로 연애의 역사였다. 감히 우리의 역사 앞에서 소개팅앱 크리스티나가 끼어들다니 모욕이다. 2년이라는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어렵게 다시 만난 자리에서 남자가 꺼내온 '첫 경험 연애사 목록'에 여자가 '파렴치한을 다시 만나다'라고 적은 것은 재회의 순간임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면서 파렴치한 그간의 남자의 행태를 파렴치하게 끌어안겠다는 의미였다.
여자는 남자와 헤어졌어도 목록은 남아있기를 바랐다. 이별을 했다고 사랑했던 시간과 역사까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남겨지길 원했다. 그런 소중한 목록인 5년 동안의 연애사를 없앨정도로 여자가 그 순간에 느낀 모욕감이 극렬했다. 소개팅앱 크리스티나 문자를 확인한 후에 극도로 화가 난 여자를 진정시키고자 남자가 취한 행동은 크리스티나의 프로필을 보여주면서 ' 보세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에요? 아니잖아요'라면서 여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거였다.
남자가 보여준 크리스티나의 프로필 사진은 연예인에 가까운 외모와 몸매를 가진 서구형 미인이었다. 보정한 사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마네킹 외모. 남자가 소개팅앱에서 탈퇴를 한다고 하자 여러 명이 메시지를 보내왔고 남자는 그들의 프로필과 사진을 확인하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크리스티나에게 카톡 아이디를 알려줬을 것이다. 혹은 그들 모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카톡 아이디를 알려줬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자에게 딱 걸린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소개팅앱에서 프로필 열람과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는 결재를 먼저 해야 한다. 그 과정에 시간과 돈을 들여놓고 남자는 굳이 크리스티나의 프로필 사진을 여자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지 않냐는 동의를 구하는 파렴치한 짓을 한 것이다. 여자도 동의한다. 남자의 스타일이 아니다. 어차피 보정한 가짜 사진이니까. 그런데 그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결재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카톡 아이디를 주고받아놓고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여자를 만나기로 작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면 소개팅앱 나부랭이에 얽혀있어서는 안 됐다.
여자와 헤어진 상태에서는 남자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이 없다.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서 붙어먹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처참했던 시간을 감내하는 것도 그런 남자를 선택하고 사랑한 여자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불륜을 저지른 대가 혹은 죄를 받는 거라 자조했다. 남자가 강조한 바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못 간다고 하니 남자는 여자와 인연을 끊고 다른 인연을 찾아 실천에 옮긴 것뿐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인연을 찾지 못하고 2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다시 여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면 여자에게 오기로 작정한 순간부터는 다른 여지는 버려야 했다. 여자 앞에서 아주 말간 어린애 같은 얼굴로 "문자가 와서 답을 한 거뿐이에요." 소개팅앱 크리스티나가 뭐 하냐고 물어봐서 약속이 있어서 카페에 있다고 답을 한 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정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개팅앱 크리스티나에게 답을 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남자는 정말 모를까? 대답을 했다는 것은 호감의 표시이며 발전 가능성을 내보이는 태도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였다. 그동안 소개팅앱을 이용해 온 사람은 남자였고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고르고 고른 여자들을 만났을 테니까.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때도 미래를 약속한 김 선생의 존재를 숨겼고 발각되었을 때는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끝난 인연이라고 한때 좋아했던 사람을 부정했던 남자다. 여자와 사귀다 헤어지면 김 선생에게 연락을 하곤 했던, 자신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면 불안한 남자의 계산 속을 또 봐버렸다. 김 선생의 경우와 소개팅앱 크리스티나는 층위가 다르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김 선생에게 연락을 하거나 여자와 헤어졌을 때 김 선생에게 연락을 한 것은 작동범위가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소개팅앱 크리스티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라고 여지를 남기는 남자의 습성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소개팅앱을 탈퇴했고 앱도 삭제했어요. 탈퇴한다고 글을 올렸더니 여러 명에게 메시지가 왔어요. 거기에 답을 한 거뿐이에요."
남자는 정말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진심을 다해 말했다. 여자는 안다. 남자가 진심으로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여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소개팅앱을 탈퇴하고 앱을 삭제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소개팅앱 크리스티나가 뭐 하냐고 물어봐서 답을 한 것뿐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사실이므로 남자는 사실에 홀려서 잡혀 먹힌 형국이 되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으므로 사실이게 한 행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남자의 논리... 사실이기에 진심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남자. 그 남자가 여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논리를 뒤집으면 안 되지. 무릎은 왜 끓는 거야.
너무 당연해서 더욱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 사이에 간극. 여자와 남자는 그 간극에서 매번 싸웠다. 싸우지 않을 수 있던 것도, 여자의 일상을 회복한 것도, 학업을 시작한 것도, 남자와 이별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정기에 접어들어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무슨 짓을 한 건지... 여자는 '첫 경험 연애사 목록'이 재로 변한 것처럼 남은 감정일랑 흔적도 없이 타버리길 빌었다. 남자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지랄 맞은 감정은 잊자... 잊자...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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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여자를 안 보고 살 자신이 없다. 재수 없는 크리스티나, 남자는 기억에도 없는 이름이었고 탈퇴한 소개팅앱에서 연락이 온 거였다. 심지어 앱조차도 삭제해서 없다. 아무것도 아닌 크리스티나가 여자와의 재회를 망치게 둘 수 없다. 어떻게 버티고 버텨서 돌아온 시간인데... 2년을 버티면서 별짓을 다해봤지만 여자를 잊을 수 없었다. 새 여자를 만나면 여자가 더 생각났고 여자와 비슷한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욕심에 소개팅앱에서 3명을 만나보기도 했는데 거의 남자에게 바라기만 하고 잘난 척에 계산적인 부류였다. 매칭을 원하는 여성란에 여자와 같은 쥐띠, 여자와 같은 나이, 여자와 같은 외모, 여자와 같은 성격, 여자와 비슷한 학벌과 취향을 입력했다. 남자에게 새 여자의 기준은 여자였다. 그런 여자는 없었다. 기준일 뿐이었다. 여자를 떠나고서야 여자의 가치를 더 알게 되었다. 그런 여자를 겨우 다시 만났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기회를 잃을 순 없다. 남자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당신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 없이는 안 되겠어요.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게 있다면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여자는 칼자국이 나있는 식탁 위에 떨어진 재를 바라보며 앉아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체취를 맡으니 울컥하니 슬퍼졌다.
"우리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데... 왜 헤어져야 해요. 우리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잖아요."
여자는 남자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미동 없이 앉아있다. 칼자국이 남은 식탁 위에 떨어진 잿가루에 여자의 시선은 고정되었다. 잿가루가 날아오르자 여자의 시선이 잿가루를 따라갔다. 남자는 여자도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여서 여자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여자의 얼굴에 조소가 잠깐 어렸다 사라졌다.
" 맞아요. 우리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고 너무 좋아해서 문제가 생긴 거죠. 나도 당신을 잊으려고 발악을 했지만 감정은 어쩌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놈의 감정이... 정리되었다고 애써 세뇌했는데 오늘 당신을 보고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이 자신의 인생을 위해 나와 인연을 끊고 다른 인연을 찾아 붙어먹다가 잘 안 돼서 다시 나에게 돌아왔을 때조차도 내가 힘들게 지켜왔던 감정.. 그 감정을 지키고 싶었어요. 내 사랑의 감정이 그리고 당신이 나에 대한 감정이 깊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나를 다시 만난 시점에 나에게 남아있던 감정을 경멸로 바꾸어버리는군요. 당신이 경멸의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했어요. 마음으로 힘들게 지켜온 감정이에요. 내 사랑의 감정이 경멸로 끝나게 둘 순 없어요."
"경멸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소개팅앱을 말하는 거라면 탈퇴했고 삭제한 거 확인했잖아요?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은 기억에도 없어요. 당신이 호주에서 돌아온 뒤에 내가 연락을 했을 때부터 당신에게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일부러 안 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나는 당신이 한국에 먼저 왔을 때부터, 그리고 한국에서 다시 당신을 만날 때도 내 마음은 당신한테 가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자꾸 김 선생 얘기를 하면서 내 마음의 진실성을 의심했었지요. 나는 그게 아니라고 얘기해도 당신은 믿지 않았지요.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늘 불화가 생겼지요. 아마도 당신은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행동이 경멸로 간 순간, 내가 그 순간을 알게 된 지금, 당신은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거예요. 내 감정이 경멸로 끝나지 않게 지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감정을 위해 멈춰야 해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나한테 오지 않을 빌미를 찾는 건가요? 당신 반쪽이라도 좋아요. 욕심내지 않을게요. 이대로 당신과 있고 싶어요. 나는 혼자잖아요.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남자는 여자의 다리에 머리를 묻고 조금 울었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지도 어깨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남자는 그 사실이 서러워 더 울었다. 남자의 울음이 잦아들자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뱉어내고는 가방을 챙겨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남자의 눈에 풀풀 날리는 잿가루가 보였다. 남자와 여자의 '첫 경험 연애사 목록'이 재가 되어 집안을 돌아다녔다. 자기야, 당신은 왜 이렇게 잘해. 당신이 최고야. 사랑해... 자기야...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거렸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바닥에 엎드렸다.
남자는 쳇 GPT에 물었다.
-여자가 나에게 돌아오게 해 줘.
더 좋은 응답을 위해 더 오래 생각하는 중....................
쳇 GTP는 더 좋은 응답을 해주기 위해서 더 오래 생각하는 중이다. 남자는 응답을 기다리다 태국법인으로 출장을 갔다. 태국에서 근무하는 3개월 동안에도 응답은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응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응답은 쳇 GTP가 아닌 여자에게 왔다.
-버킷리스트 또 하나 완료~^^
-상담심리학회 차세대 연구자로 선정되었어요.
-만나는 사람, 혹은 마음에 두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다시 모든 것을 차단, 삭제할게요. 오늘은 당신이 말한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걸 가장 같이 나누고 싶은 사람이 당신이어서 연락한 거예요.
야호, 여자가 카톡 차단을 해제했다. 남자는 사무실에서 카톡을 받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호를 질렀다. 현지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봐도 상관없었다. 당장 여자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카톡을 보냈다.
-잘했어요. 축하해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뤄가는 게 부럽기도 하고...
여자가 바로 읽고 답을 했다.
-전에 명확히 하고 싶은 건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마음에 두고 쫓아다니고 있다면 그것 먼저 알려주세요. 그에 따라 대화를 할 수도,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정확한 답이 필요해요.
-없어요. 그러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쉽군요! 아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