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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18-여자 최승희﹠남자 이열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8화

by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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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치앙마이 공항에서 올드타운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희뿌염하게 어둠이 걷히는 거리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6년 만에 치앙마이, 파란 벤치로 가고 있다. 여자와 남자가 파란 벤치에서 여명을 같이 보며 새해 인사를 나누었던 장소이자 코로나 시대 사랑의 서막이 열린 곳으로.


여자가 파란 벤치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남자는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물었다. 여자는 '감정이 경멸로 변하지 않는 한'이라고 답을 했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향하는 감정이 남아있는 만큼 사랑하기로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남자가 감정에 반하는 배신행위를 하는 순간, 남아있는 감정이 경멸로 바뀌기 직전에 멈출 수 있는 면역을 믿었다. 그간의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면서 생긴 감정의 면역은 집착과 질투와 구속이라는 사랑의 속성을 빼내고 생긴 면역력이었다. 여자에게 남아있는 감정은 이제 단단하고 가볍다.


택시가 올드타운에 들어섰다. 타페 게이트가 보인다. 여자가 숱하게 걸어 다녔던 구시가 골목을 지나자 저만치 파란 벤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가 6년 전에 처음 만난 곳에 다시 왔다. 남자는 안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케리어를 꺼내려는데 어디선가 남자가 나타나서 케리어를 받았다. 담배 연기 향이 남자에게서 났다. 여자의 시야에서 벗어난 나무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예전에 여자가 웃었던 것처럼 활짝 웃으며 여자를 맞았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잘 왔어요."


"일찍 왔네요?"


"자면 못 일어날까 봐 안 자고 나왔어요."


여자는 피식 웃음이 났다. 매번 자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하거나 약속 시간에 늦기 일쑤인 남자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잠을 포기했다니 칭찬을 해줘야 하나. 남자가 케리어를 끌고 파란 벤치 옆에 세워놓고 손수건을 꺼내 여자가 앉을자리를 만들었다. 여자는 남자가 깔아준 손수건 위에 앉고 남자는 여자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6년 전과 같은 자리에서 여명이 열리는 순간을 함께 바라봤다. 날이 환하게 밝을 때까지 여자와 남자는 파란 벤치에 앉아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카페 안에서는 오픈 준비를 하는지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가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섞어 들렸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열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확신에 찬 남자의 표정에 결의마저 보였다. 제대로 시작을 해보려는 간절함과 완고함이 눈빛에 묻어났다. 여자는 상황을 이해했고 공감했으므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승희예요."


"이 집 커피가 맛있는데 같이 마실까요?'


"저도 이 집 커피 좋아해요."


남자는 왼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둘러 안아 에스코트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케리어를 끌고 파란 벤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6년 전 새해 첫날, 처음 만난 그날처럼 파란 벤치 카페에 첫 손님이 되었다. 6 년 전에는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 커피를 마셨는데 지금은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서로를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남자가 커피잔을 달각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처음 본 순간부터 끌렸어요. 사귀고 싶습니다. 저는 돌싱이고 프리합니다."


"저는 결혼한 사람이에요."


"제가 감당하겠다면요?"


"감당하기 힘드실 거예요."


"그건 두고 보면 알 게 될 거고... 6년 전에 사랑에 빠졌는데 제가 시작을 잘못해서 만나는 내내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시작을 제대로 하고 싶어요. 그때는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숨겼어요. 그분에게 마음을 다 주고 사랑에 빠져있어서 말할 필요를 못 느꼈던 거죠. 똑같은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저 혼자 판단해서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일이나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거리낄 게 없다는 뜻인가요?"


"네, 제 마음엔 오직 최승희 씨 밖에 없습니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데시를 하시는군요?"


"최승희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끌렸고 그런 사람을 놓치기 싫어서 대시를 하게 된 경우는 최승희 씨가 처음입니다."


"처음이군요. 처음..."


여자는 처음이라는 말을 입속에서 여러 번 굴렸다. 남자는 6년 전 그날로 돌아가서 자기가 해야 할 말은 다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김 선생 일로 여자와 싸울 때마다 자책했었다. 6년이라는 시간을 돌아온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난 장소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자가 주로 하던 제삼자 대화법을 이용한 상황극으로 과거를 지우고 있다.


생각에 빠져있던 여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커피잔을 쥐기 위해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여자의 오른손을 남자가 조심스럽고도 정중하게 자신의 손안에 넣었다. 따뜻했다. 열대의 나라에서 여자는 분명 따뜻하다고 느꼈다. 여자가 잘 아는 손, 익숙한 손이 처음인양 가장해도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손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당신만 동의한다면..."


여자의 눈빛이 주춤대다 커피잔에 가닿았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어라 싸우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다가 인연을 끊어내기까지 이르렀고 남자는 다른 인연을 찾아다니다 실패하고 여자에게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여자는 얼음 조각이 녹으면서 커피 밑으로 가라앉는 모양을 바라봤다. 여자가 치앙마이, 파란 벤치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남은 감정만큼만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남은 감정이 여자와 남자가 같은지 차이가 나게 다른지 알 수없다. 여자는 남자 역시 전체 감정이 아닌 남은 감정에 기대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포기를 필두로 집착과 구속이 빠져나간 감정. 기본적인 사랑의 속성이 제거된 감정. 6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결과 앞에서 새로운 처. 음. 을 맞이하기 위한 말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감정이 경멸로 변하지 않는 한에서 가능해요."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카페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듣는 태국어가 신선하다. 여자의 귀에 들리는 말은 싸왓디와 컵쿤카 정도였지만 도르륵 굴러가는 태국어와 그림 같은 태국 글자가 이국에 와있다는 실감이 났다. 서너 명의 젊은이가 카페 안에 들어서니 꽉 찬 활기가 넘친다. 왁자한 태국어 사이로 남자가 잠은 좀 잤냐고 물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고개를 흔드는 여자에게 남자는 숙소로 가서 일단 좀 쉬자고 했다. 남자는 전날 항공편으로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와서 파란 벤치와 가까운 숙소에 묵었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의 케리어를 끌고 여자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10분 정도 걸어가는 중에도 땀이 줄줄 났다. 익숙한 사원 몇 개를 지나고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란나 음식점과 세븐 일레븐을 지나가는 동안 남자와 여자는 손을 놓지 않았다. 치앙마이 아침 거리를 여자와 남자는 땀이 흥건하게 배도록 손을 잡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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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를 만나기로 한 전날,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먼저 와서 숙소 컨디션을 확인하고 주변 경관도 살폈다. 여자가 좋아할 만한 숙소를 고르느라고 골랐지만 신경이 쓰였다. 여자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흥분으로 잠을 자는 것은 포기하고 어두운 새벽에 파란 벤치로 나왔다. 파란 벤치 뒤로 우람하게 뻗은 나무는 그사이 몸피가 커졌다. 파란 벤치는 칠이몇 군데 벗겨지고 색이 바랬다. 카페는 아직 불이 꺼져있다. 희뿌염하게 변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긴장이 되어서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여자가 파란 벤치 앞에 도착했다. 파란 벤치에 앉아서 6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봤다. 아쉽게도 여명 속에 빛나던 여자의 웃음은 보지 못했다.


여자는 그사이 얼굴이 핼쑥해졌다. 시간에 쫓기며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논문까지 쓰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오히려 여자를 힘들게 하고 도움이 안 됐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해서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파란 벤치에 혼자 몇 번 다녀갔다. 태국법인 출장 중인 어느 주말에 휙 치앙마이로 넘어와서 구도시를 어슬렁거리다가 파란 벤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여자와 싸우지 않고 사랑만 하던 치앙마이에서 보낸 3주를 회상하면서 한 번은 찔끔거렸고 한 번은 여자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남자는 여자가 앞에 있는데 믿기지가 않아 손을 잡았다. 이 손을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속으로 백번은 되뇌었던 것 같다. 불완전한 관계가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었다. 후회 없이 시작을 잘하고 싶었다. 처. 음 만나는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열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승희예요."

"이 집 커피가 맛있는데 같이 마실까요?'

"저도 이 집 커피 좋아해요."


남자와 여자는 파란 벤치 카페에서 6년 만에 커피를 같이 마셨다.


숙소에 짐을 풀고 여자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남자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남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오를 넘긴 시간이었다.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여자를 찾았다. 여자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고 커튼을 치지 않아 햇빛이 여자의 몸에 가닿았다. 남자는 소리 나지 않게 깨금발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여자는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이 없다. 남자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서 여자를 바라봤다. 가지런한 눈썹, 높지는 않지만 바른 콧대와 윗입술과 아래입술의 균형은 여자의 얼굴을 동안으로 보이게 했다. 그사이 단발에서 길어진 머리카락은 남자가 여자를 파란 벤치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남자가 첫눈에 반한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여자와 같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여자가 놀라서 눈을 떴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깼어요?"

"몇 시예요?"

"12시 30분이요."

"배고프겠네요. 점심 먹으러 가요."


남자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남자가 배고픈 걸 먼저 생각하는 여자를 보면서 마구 복받쳤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여자를 안았다. 남자의 품이 꽉 찼고 복받치는 감정은 폭발 지경이다. 입을 맞췄다. 매끈하고 말랑한 입술이 포개지자 혀의 감촉이 살아났다. 남자는 여자를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겨 키스를 퍼부었다. 목덜미에 코를 박아 여자의 살냄새를 들이마시고 입을 맞췄다. 여자도 남자를 안았다. 남자의 숨소리가 커졌다.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발작적으로 젖꼭지를 빨고 물었고 전신에 입을 맞췄다. 허벅지를 거쳐 무릎, 종아리, 발가락까지 여자의 몸을 핥아 내렸다. 여자는 이전과 달리 몸이 경직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았다. 적극적인 몸놀림으로 완전체의 느낌을 갖게 해 준 여자였는데 그동안 헤어져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의 살 향에 몽롱해졌고 흥분이 극에 달해서 여자의 안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경직된 여자의 근육은 남자를 힘겹게 받아들였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자 여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열려야 몸이 열려요. 시간이 필요해요."


남자는 여자를 바짝 끌어당겨 힘껏 안아 입을 맞췄다.


"사랑해."


남자가 '사랑해'라고 말한 순간 여자의 등근육이 딱딱해졌다. 남자는 몸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준 여자가 고마웠다. 여자의 마음이 열릴 수 있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 남자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선은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 소문난 브런치 카페로 가서 여자가 좋아하는 메뉴로 식사를 하고 그다음을 생각하자. 6년 전 여자와 함께 치앙마이에서 보낸 3주간의 꿈같은 시간을 다시 갖는 거다. 다시 처. 음.처럼... 그런데 여자의 일정을 안 물어봤다.


'당신 얼마나 태국에 머물 거예요?"


"일주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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