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7화
XX17
여자는 상담심리학회 차세대연구자로 선정되었다는 발표가 나자 남자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남자는 좋은 일이 생기면 여자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심지어 헤어진 상태에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연락을 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에 대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어린애 같은 모습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남자를 이해한다. 여자도 똑같은 마음이니까. 차단했던 남자의 모든 SNS를 해제하고 문자를 보냈다.
-버킷리스트 또 하나 완료
-상담심리학회 차세대 연구자로 선정되었어요.
-만나는 사람, 혹은 마음에 두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다시 모든 것을 차단, 삭제할게요. 오늘은 당신이 말한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걸 가장 같이 나누고 싶은 사람이 당신이어서 연락한 거예요.
남자는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축하를 해줬다. 만나는 사람, 혹은 마음에 두고 쫓아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남자는 태국법인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당장 한국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여자는 당분간 SNS로만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여자는 고양된 상태에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거쳐 논문 발표까지 편히 잠을 잔 날이 없었다. 몸은 고달프지만 일이나 감정의 상태가 활성화되어 추진력이 배가되었다. 남자를 만나는 동안 잊었던 혹은 잃어버렸던 기능이 더 강력해져서 돌아온 듯했다. 같은 감정이 다르게 작동하는 모양이 신기했다. 온전하게 쏟아부은 감정은 똑같은데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은 행복감과 고통이 동시에 오고 학문을 대하는 감정은 성취와 만족이 동시에 왔다. 두 감정의 공통점은 중독이다. 사람에게 중독되어 도파민이 왕성하게 분비되었던 시간과, 학문에 중독되어 분출된 도파민의 결과는 동시에 강렬한 감정과 행동을 유발하는데 여자의 입장에서는 후자에 쏟는 에너지가 전자의 감정을 희미하게 했다. 남자에 대한 감정은 고요해졌다. 그래서 남자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남자를 만나게 되어도 남은 감정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남아있는 감정을 긍정적으로 전환하여 좋아하는 감정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비윤리적임에도.
결과적으로 여자가 사랑한 것은 감정이었다. 여자는 부도덕하지만 남아있는 감정을 선택했다. 그만큼 여자의 인생에서 소중하고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여자의 인생에서는 다시없을 것이므로 남아있는 감정을 잘 추슬러 사랑이라는 감정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의 편에 서기로 했다. 집착도, 질투도, 소유욕도 잘려나간 감정에 미련 없이 보내버리고 남은 감정으로 평화롭게 감정을 이어갈 결심. 이제 여자에게 강렬하고 갑작스럽게 누르기 어려운 감정, 즉 격정이 빠졌다. 여자에게 남은 감정 중에 격정과 열정이 빠진 상태라면 서로를 구속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남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배신과 모욕의 시간을 삭이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을 보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여자는 여전히 바쁘게 일하고 공부하느라 주로 남자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남자는 태국법인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여자가 만남을 유보하고 SNS로만 소통하자 안달이 났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난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자고 했고, 여자를 위한 집을 사면 자신에게 올 거냐는 말도 했고, 여자가 손을 내밀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여자는 제삼자 대화법으로 남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여자가 묻고 남자는 답하는 식이다.
당신은 애인이 있나요?
있지요.
당신 애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뭐가 좋아요?
잘해주고 말이 통하고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
당신 애인은 잘 웃나 봐요?
잘 웃어요. 웃는 얼굴을 보면 행복해져요.
애인이 웃을 일을 만들어주는 편인가요?
흠...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울게도 만들었네요.
당신 애인은 언제 울어요?
잘 모르겠는데... 나 때문에 운 건 맞아요.
그럼 잘 아는 건 뭐예요?
여자를 사랑한다는 거
여자도 그걸 알아요?
흠... 잘 모르는 거 같아요.
지금 행복하세요?
행복하지만 슬프기도 해요.
왜요?
애인이 있어 행복하지만 내 여자가 아니니까요.
여자는 여기까지 하고 멈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위험 수위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 남자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제삼자 대화법은 예전에도 가끔 써왔다. 남자의 마음을 확인하고 대부분 흡족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었고 가끔은 싸웠다. 싸우는 이유는 늘 똑같았다. 결국에는 신뢰의 문제인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신뢰가 없어도 좋아하는 감정은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이 깊어 생긴 병에 걸려서 앓았던 것 같다. 이제 면역력이 생겨서 남자가 정부情夫 운운해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정부로 살든 다른 인연을 찾아 떠나든 남자의 몫이다. 다만 여자에게 남은 감정이 경멸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 오면 멈추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여자는 그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만 남은 감정을 남자와 같이할 결심.夫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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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가 연락을 해온 게 믿기지 않았다. 여자의 버킷리스트를 알고 있기에 더욱 고마웠다. 그것도 기쁜 소식을 남자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다니 당장 달려가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여자가 거부했다. 아직도 남자에 대한 마음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2년 넘게 이별을 하고 또 시간을 낭비한다니 기가 막혔지만 기다려야 했다. 여자가 마음을 열 때까지... 괜한 짓을 해서 동티 나는 일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만 했다.
여자가 원하는 대로 SNS로만 소통하고 있다. 그 기간이 벌써 4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예전처럼 사랑을 속삭이거나 애정 표현이 빠진 담담한 문자를 주고받았다. 여자는 연구자로 선정되고 더 바빠졌고 남자도 사진동호회와 역사 답사 모임에 다시 나갔다. 바쁜 와중에 남자는 매일 여자에게 연락을 했고 가끔 통화했다. 예전에 몇 시간씩 통화했던 것을 생각하면 짧은 통화에 불과하지만 여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안도가 일상을 평온하게 살게 해 줬다. 그렇지만 태국법인 출장 날이 다가오자 남자는 조바심이 났다. 출장 가기 전에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바쁜 여자의 시간에 맞추느라 밤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며칠 뒤에 태국 출장 가요. 그전에 만나고 싶어요.
-지금은 시간을 낼 수 없고... 먼저 가 계세요.
-네? 무슨 뜻이에요?
-먼저 가 계시면 다음 달에 일정 조정해서 갈게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당신이 태국으로 온다고 했어요?
-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끝내고 연차내서 갈게요.
-어디로? 어디서 만나요?
-우리가 처음 만난 치앙마이 파란 벤치에서...
-우리가 처음 만난 파란 벤치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거기서 봐요
여자가 서둘러 전화를 끊는 바람에 통화는 짧게 끝났다. 통화를 하고 바로 여자가 문자를 보냈다.
- 감정이 경멸로 변하지 않는 한...
남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핸드폰만 바라봤다. 여자가 보낸 문자의 내용은 와닿지도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를 다시 만난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파란 벤치... 여자와 처음 만난 장소... 그곳에서 다시 여자를 만난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가만있자, 뭘 해야 하지. 남자는 거실을 왔다갔다하더니 여자가 좋아하는 마리아칼라스 음반을 틀었다가, 잔에 맥주를 따라놓고 잊어버리고, 케리어를 들고 나와서 펼쳐놓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밤늦도록 우왕좌왕이었다. 파란 벤치... 여자의 웃음소리... 여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 혼자 남겨진 게 참을 수 없어서 이사를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이 집에 여자가 다시 온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여자가 맨 몸에 입었던 핑크색 꽃무늬 앞치마는 여전히 싱크대 고리에 걸려있다. 여자와 헤어져있던 시기에도 앞치마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남자는 발가벗은 몸에 앞치마만 두르고 자신에게 달려와 안기던 여자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여자의 웃음소리와 핑크꽃잎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날아다녔다. 남자는 핑크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거실 바닥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여자가 달려와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