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싸움 13-언제든 배신하는 자유를 누리시라!

몽상가 소설 [파렴치한 연애] 13화

by 몽상가



XX13



여자는 어젯밤에 남자가 보낸 문자를 본다.


--내가 졌어요. 내일 갈게요.


졌다니 무슨 말인가. 무슨 내기를 했길래 남자는 졌다고 승복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여자가 호주에 있을 때 카톡을 차단하면서 연락이 끊겼었는데 남자가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해왔다. 이전에 페이스북 메신저로 소통한 적이 없어서 예상하지 못한 경로였다. 여자는 이후에도 페북메신저를 차단하지 않았다. 무슨 미련이 남아있어서 차단하지 못하는지 여자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자는 차단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남자가 페북메신저로 연락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여자는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스탠스는 아직 그대로 인가요? 바뀔 여지는 없나요?


여자가 가정을 깨지 않겠다는 변함없는 스탠스 때문에 여자와 인연을 끊고 다른 여자들과 실컷 붙어먹고 다닌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남자가 원하는 단 한 가지, 남자와 부부로 사는 것을 들어줄 수 없었기에 다른 인연을 찾겠다는 남자를 보내줘야 했고 술에 취한 남자로부터 새로운 여자와의 만남과 섹스와 뒷담화까지 오물을 뒤집어쓰듯 들어야 했다. 그것조차 여자가 남자에게 가지 못하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생지옥이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을 내기라고 생각하다니! 그 시간을 내기라고 생각한다는 유아적 발상이 남자답다는 생각에 이르자 역시 사람은 바꿔 쓸 수 없다는 말이 와닿았다. 더구나 여자의 사랑을 '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변함이 없는 사람이 물어볼 말도 아니고 이미 자격 상실이다.


그런 남자를 여자는 기다리고 있다.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남자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오늘은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라 남자가 오면 수업에 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자는 이제야 겨우 찾은 자신의 자리와 일상에 남자가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퇴근 시간이 넘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수업에 늦는다. 머뭇거리지 말자. 여자는 가방을 챙겨 연구소를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니 교정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메신저를 열어봤다. 어젯밤에 남자가 보낸 '내가 졌어요. 내일 갈게요'가 마지막 문자였다. 여자는 피식 웃었다. 무슨 기대와 미련이 남아서 수십 번도 넘게 남자가 보낸 문자 내용을 보고, 또 보고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했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에게 향하는 감정이 남아있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잊어야 하기에 잊으려 했을 뿐, 남자의 배신으로 이전의 감정은 약화되었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자신을 보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와의 인연을 끊고 다른 인연을 찾아 헤매다가 뜬금없이 어느 날 여자에게 오겠다고 해놓고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화가 솟구치거나 따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미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은 떠나보낸 지 오래고 약간의 감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감정조차 이 기회로 완전히 사라지기를 여자는 바랐다. 오히려 잘됐다. 남자여, 언제든 배신하는 자유를 누리시라!


다음날은 상담 일정이 바쁜 날이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시간이 났다. 메신저 알람이 와있었다. 남자가 보낸 문자였다.


--미안해요.


1년이라는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뜬금없이 '내일 갈게요'라는 문자를 보내더니 나타나지도 않고 연락도 없다가 다음날 '미안하다'는 문자가 다였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나마 남은 감정까지 다 씻겨나가게 해 준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남자를 사랑했던 시간과 추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테지만 감정은 남아있지 않기를 바랐다. 여자의 바람대로 남자가 도와준 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처리되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페북메신저를 차단하지 않았다.


여자는 영화 '마리아'를 예매했다. 남편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문자를 보냈다. 호주에서 돌아온 뒤에 일과 공부에 전념하면서 남편에게도 소홀하지 않게 신경을 쓰고 있다. 남편 역시 여자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기쁜 기색이다. 그동안 남자와 사랑놀음에 빠져서 정신이 없었다. 여자의 감정이 우선이었기에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불륜도 무섭지 않았다. 여자는 불륜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로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에 후회도 없다. 그러나 사랑은 끝났고 여자는 가까스로 제자리에 돌아왔다.


남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마리아'는 남편 취향은 아니었지만 남편은 언제나처럼 여자의 취향에 맞춰줬다. 마리아 칼라스의 실제 공연과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하는 안젤리나 졸리의 장면이 교차되면서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마리아 칼라스가 오나시스가 죽기 전에 '항상 당신을 사랑했어'라는 말을 했다고 할 때 여자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오랜 연인이었던 오나시스가 마리아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충격으로 무대에 서지도 못하고 약물에 의지해서 살게 되었음에도 마리아의 환상 속에서 오나시스는, 죽기 전에 마리아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에는 약도 없다. 약물중독이 되어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와중에도 사랑의 감정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사랑은 약이 소용없다. 영화관 사운드가 좋아서 마리아칼라스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여자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남편은 그런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여자는 그 순간, 남편이 아닌 남자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XY13


남자가 눈을 떴을 때는 하루가 지나있었다. 하노이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집에 가서 좀 쉬다가 기운을 회복하고 여자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나갈 계획이었다. 싸파에서부터 감기 몸살 기운과 왼쪽 귀 막힘으로 고생을 했는데 비행기 고도가 올라가는 어느 지점에 왼쪽 귓속이 찢어지는 통증이 오더니 귀가 완전히 막혔다. 고압에 의한 일시적인 귀 막힘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승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면서 귀에 대고 증기를 쐬라고 했다. 차도가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왼쪽 귀는 안 들렸다. 한쪽 귀가 안 들리는 것만으로도 거동이 불편했다. 아직 몸살 기운이 남아있어서 몸의 중심을 잡기가 더 힘들었다. 병원을 가야지 생각했지만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떠보니 하루가 지나버렸다. 아픔 몸을 이끌고 회사에 출근을 했다. 오후에 짬을 내서 회사 근처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중이염이라고 했다. 간단한 처지와 처방을 받아왔다. 오늘만 잘 버티면 주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약을 삼켰다. 순간, 싸파에서 약을 삼키던 장면이 떠올랐다. 뒤이어 여자에게 메신저로 문자를 보낸... 남자는 핸드폰을 황급히 열었다. 메신저... 메신저... 남자는 여자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 시선이 멈췄다.


--제가 졌어요. 내일 갈게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간다는 날짜는 어제였다. 하루가 지나 지금은 오후 4시가 되어간다. 남자는 급격하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오랜 이별 끝에 어렵게 건넨 마음인데 오히려 패착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수습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와 헤어진 후에도 술에 취하면 연락을 해서 남자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온갖 추잡스런말로 여자에게 상처를 준 것이 부끄러워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 버티고 버티다 여자를 안 보고는 살 수 없게 되자, 아니 버티기를 포기하고 여자를 만나기로 생각을 바꾸고 행동에 옮긴 것이었는데... 완전히 망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미안해요'이 한 문장을 여자에게 보냈다. 여자의 황당한 표정과 화를 참느라 미간에 잡힌 주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쩌면 태국 출장 3개월 동안 조이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도 여자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여자와 1년을 헤어진 상태에서 다른 인연을 찾으려고 한 건 사실이지만 여자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여자에게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여자를 만날 준비를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었나 보다. 그 기회를 망쳐버렸다. 남자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다는 여자의 마음에 확신을 준 셈이다. 몸이 아파서 그런 거니 사정을 이야기하면 여자가 봐주지 않을까. 여자는 남자가 아프거나 불편하면 항상 달려와줬고 보살펴줬었다. 예전처럼 아프다고 호소를 해볼까? 아무리 그래도 잠을 자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평소에 잘 만나오던 사이도 아니고 남자 스스로 끊어낸 인연을 다시 이어 붙이려 시도했는데 빈말로 끝나버린 꼴이라 더 면이 서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일단 약을 먹고 자야겠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자는 빈속에 약을 털어 넣었다.


남자의 중이염은 4주 만에 나았다. 주위에서는 한쪽 귀가 안 들리는 상태가 4주 이상 간다는 건 위험하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남자도 이번 주까지 귀가 안 들리는 상태가 지속이 되면 다음 주에는 큰 병원으로 가볼 생각이었는데 4주 차에 왼쪽 귀 막힘이 사라졌다. 세상의 소리가 명쾌하게 들렸다.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릿속도 개운해졌다. 남자는 귀가 뚫린 기념으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기로 했다. 개봉관에서는 영화를 내려서 신촌에 있는 독립영화관으로 가야 했다. 혼자서 하는 것을 잘 못하는 남자였지만 혼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여자와 같이 보고 싶었던 영화 '마리아'.


여자는 마리아칼라스를 유난히 좋아했다. 아담한 독립영화관에 마리아칼라스의 목소리가 가득 찼다. 자리가 반 정도 찬 극장 안은 적당한 열기와 격조 있는 오페라의 선율로 인해 환상의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마치 오페라 공연장에 와있는 착각이 들정도였다. 음악소리가 멈추고 죽음을 앞둔 오나시스가 마리아에게 '늘 사랑했다'는 대사가 나오고 그 말을 전해 들은 가상의 기자가 마리아에게 하는 말에 전율이 일었다.


--재키는 그의 아내였지만 당신은 그의 삶이었어요.


남자는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는 다른 사람의 아내였지만 남자가 여자의 삶이었을까? 여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삶이라고 생각했나요? 남자는 당장 여자에게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는다. 마리아칼라스의 목소리가 남자의 귀에 속살거린다. 어서 가요. 여자에게 달려가요.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스크린 속에 여자와 함께 마리아칼라스 음반을 들으며 사랑을 나누던 비 오는 어느 날이 펼쳐졌다. 여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웃음소리는 왼쪽 귀속에서 계속 울렸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갑자기 소리가 멈추고 불이 켜졌다. 영화관 안에 남자 혼자 남아 웃고 있었다.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12화싸움 12-맘정, 몸정, 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