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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 뒤에 가려진 사랑의 조각

by 엄마의 서랍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들을 들여다보다가 그 아래 숨어 있는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따뜻했던 장면들은 대부분은 IMF 이전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빠가 회사를 다니던 시절, 엄마는 전업 주부였다. 하교 후 집에 오면 늘 맛있는 간식을 만들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엄마의 간식을 먹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다. 식혜, 고구마 맛탕, 간장국수는 지금도 내 기억 속 '엄마표 간식'으로 남아 있다. 방학 때는 우리 남매와 도넛 만들기도 했다. 맥주잔과 소주잔으로 반죽을 찍어내어 모양을 만드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요즘의 나는 퇴근 후에 늘 허겁지겁 집에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연다. 냉동실의 다진 소고기 큐브를 꺼내며 "엄마는 늘 갓 지은 밥과 수제 간식을 만들어 주던 사람이었지"하고 떠올린다. 그럴 때면 아이에 대한 미안함인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이 스친다. 그렇게 나는 어릴 적 기억 속의 엄마를 조금씩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빠와의 기억도 있다. 주 6일 근무를 하던 시절의 어느 토요일. “얘들아 에버랜드 가자!” 놀이터에서 놀던 우리 남매에게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젊은 아빠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신이 난 우리는 가는 내내 자동차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앞자리에 탄 부모님은 우리의 노래를 들으며 끊임없이 웃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아쉬워하는 우리에게 아빠는 내일 또 오자며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 워킹맘인 지금 생각해 보면 주 6일을 근무하고 아이들을 위해 주말 이틀 내내 놀이동산에 간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가게를 시작한 후부터 우리 가족의 추억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아빠는 나와 동생의 교복만큼은 직접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반에서 제일 말끔하고 주름 하나 없는 단정한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고등학생 시절, 고단함을 이기고 두 분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 새벽에 마중을 나오셨다. 독서실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 중 마중을 나오는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이 유일했다. 가게 일을 시작한 뒤에도 부모님은 자신들만의 최선으로 우리를 지원하고 있었다.


좋은 기억들은 생각 외로 소소한 일상 속에 오밀조밀 숨어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기억된 나의 어린 시절 속에도 부모님이 심어준 사랑의 조각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닮고 싶지 않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존경스러운 모습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부모님의 인생이 고달파지면서부터 우리 남매와 관계가 멀어졌다는 것이다. 처한 환경이 힘에 겨우면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있다. 우리 모두가 늘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워킹맘으로 살며 아이에게 좋은 부모로 기억되기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매일 체감한다. 업무 스트레스와 집안일로 체력이 고갈된 날엔 아이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조차 너무 벅차다.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말투와 아빠의 짧은 대답들이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젊은 날의 부모님 얼굴이 그리워졌다. 요즘 들어 우리 남매를 어려워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부모님의 작은 어깨가 유난히 더 초라하고 안쓰럽게 보인다. 서운함 위에 켜켜이 쌓인 거리감 때문에 말을 꺼내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지만 기회가 된다면 늦기 전에 "감사하고 존경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또다시 나에게는 숙제가 남았다. 나와 부모님 사이에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내 아이에게 똑같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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