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
*(생각을 끄적이는 북리뷰나 에세이는 편의상 짧은 말로 쓰기로 하였습니다. 양해를......)
에릭 길이 쓴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라는 책을 읽었다.
한번 겉핥기식으로 쭉 읽어 내려간 것이라서 구체적으로 적기가 어렵지만, 우선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1930년대 즈음 산업혁명 이후로 기계화가 진행되어 인쇄에도 기계화와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을 즈음, 수공예와 대량생산에 대한 에릭 길의 생각을 볼 수 있었다.
기계를 무조건 나쁘다 하거나, 무조건 찬양하거나 하는 문제(혹은 수공예가 더 진실되다거나 가치 있다거나 하는 것 역시)를 떠나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이 두 가지는 공존할 것이고, 양쪽이 모두 가치가 있다고 보는 듯하다. 물론 적절한 방식으로 이 두 가지가 존재해야 한다.
수공예의 덜 완벽해 보이는 부분이 그 나름대로 맛이 있고 가치가 있다. 대량 생산된 인쇄물에도 잘 정제되어 제작된다면 합리적 측면(가격)에서 그리고 보급률에 대한 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수공예가들은 마치 기계로 만든 것처럼 완벽한 책을 만들려고 하고 반면에 인쇄소에서는 대량 생산된 인쇄물이 마치 장인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게 제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목이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라서 서체와 폰트의 형태 등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그 외의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과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여 이야기를 풀어 주고 있다.
에릭 길에 의하면 독일식 합리주의 디자인과 비슷하게 서체는 온전히 가독성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며 타이포그래피는 가독성 즉 읽는 사람이 가장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아마도 이는 얀 치홀트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또한 디자이너의 창의적 실험과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짧게나마 그러한 실험이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정신을 잃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 지기를 소망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윌리엄 모리스의 공예 운동 때와 비슷하게도 에릭 길은 대량생산으로 인한 노동자(인간성을 상실하고 기계처럼 생각 없이 일하는 일꾼들)가 처한 처지가 공장주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기계라는 것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공장주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계층이었고 에릭 길도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모리스와 에드워드 존스턴 등 미술공예 운동의 근거지인 해머스미스에서 살았던 것 또한 이를 반영한다. 여기서 윌리엄 모리스, 에드워드 존스턴, 에릭 길의 라인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에릭 길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는 매우 훌륭하게 쓰인 타이포그래피의 고전으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 얀 치홀트의 '뉴 타이포그래피'도 마찬가지로 – 현재의 사회 맥락에 맞게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이 쓰인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잘못된 규범이나 규칙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한 에피소드를 예로 들자면 어떠한 학생은 하나의 책에 혹은 페이지에는 하나의 타이포그래피(서체)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규범이 만들어질 수 없는 요소이다. 미학이라는 철학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장이 아주 오랜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완성(?) 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것과 같다. 서로 다른 이론을 내세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놓고 보더라도,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 이는 예술 사조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하나 완전히 옳은 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의 맥락에 맞추어 진화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아무튼 기억나는 대로 짧게 적어 보았다. 다음에 조금 더 자세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야기 해볼 기회가 온다면 다시한번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