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창업 이야기 20
얼굴이 굳어진 김 디자이너의 모습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폭파 직전이다.
김 디자이너: "뭐라고요? 광고지 필름이 안 갔다고요?"
대구의 K 서점 1층 매장 중앙 자리에 우리 책을 광고하기로 이미 계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광고 자리에 광고 필름을 넣어야 하는데 필름이 도착하지 않았단다. 광고가 주말을 끼고 시작하는 터라 기대가 컸다. 주말 특수효과가 제대로 날 것이라 판단한 첫 주 토요일 오후 2시.
대구에서 3시가 가량 떨어진 덕평.
우리는 덕평의 한 휴게소에서 순댓국을 먹다가 전화를 받았다.
덕평휴게소에 내린 것은 길을 잘못 들어서였는다. 우연찮게 대한민국 맛집 100에 소개된 집이라는 간판을 보고 스티브 팀장이 입맛을 다시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과연 맛있었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맛있었다. 순대가 잘 내려가다가 고속도로 정체에 걸려 급정거된 것처럼 식도에 멈춰 섰다.
토니: "김 디자이너, 어째 된 겁니까? 필름이 왜 서점에 도착을 안 했나요?"
차분히 내가 물었다.
다짜고짜 화내면 안 된다.
김 디자이너: "아무래도 3층 광고 공간에는 가로 필름을 보내었는데 1층 광고 공간에는 세로 필름이 안 간 거 같습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습관이 있는 김 디자이너가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 잘 먹던 순댓국과 순대 모둠 앞에서 밥 숟가락을 놓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안타깝다.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때 사람은 가장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냥 묵묵히 나는 바라만 보았다.
바깥에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김 디자이너에게 질문을 했다.
상태를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해결책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이다.
토니: "주말 내에 필름을 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 디자이너: "네. 우선 K문고에 연결되어 있는 광고 제작업체가 경기도 안산에 있는데 오늘은 영업을 안 한다네요. 제가 지금 대구의 필름 인쇄소에 알아보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오바마 톤)
클레어 팀장: "토니, 제가 지금 K문고에 와 있는데 1층 광고 자리에 우리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이 광고가 되어있는데 제가 파악해서 조치하겠습니다."
워드 스미스 출판사의 힐러리 클레어 팀장이다.
자초지종을 통화로 말씀을 드렸더니 이내 다시 문자가 온다.
클레어 팀장: "그럼 제가 중앙로에 몇 군데 사진관 하고 인쇄소에 들러봐서 토니 대구 도착하시기 전까지 광고 걸어두겠습니다."
덕평에서 대구로 오는 2시간 동안 나는 운전을 하고 김 디자이너는 옆에서 수십 군데 인쇄소에 전화를 했다. 스티브 팀장은 뒷자리에서 노곤했는지 잠을 자고 있다. 오늘따라 스티브 팀장의 코 고는 소리가 몹시 얄밉다.
김 디자이너: "어~어! 형님 앞에 차!"
그렇다. 대표라는 명칭은 공식적인 명칭이고 김 디자이너는 주로 둘이 있을 때 나를 형님이라 부른다. 처음엔 무슨 파도 아니고 형님, 형님 그러니 조금 겸연쩍었는데 이내 익숙해졌다.
고속도로에서 급정거라니 이건 뭔 말이야!
안전거리를 미확보했다면 필히 쥐포가 될 만한 상황이었다. 핸들을 이리저리 젖히며 겨우 충돌을 모면했다. 지나고 보니 고라니가 고속도로에서 로드킬(길 위에서 죽음)을 당한 사태로 앞차가 급정거하게 되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한다.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일 말이다. 대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일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는 앞머리는 머리카락이 있지만 뒷머리는 대머리다. 앞에서는 잡을 수 있지만 뒤에서는 잡지 못한다. 잡을 머리털이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책을 제작해서 서점에 내었을 때 출간하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의 지속적인 노출이다. 신간 효과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파워블로그를 만들기로 프로젝트 기안을 짰다. 그리고 3개월간 준비해 봄이 오면 활짝 피는 벚꽃과 함께 블로그를 오픈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먼 미래를 잘 준비했더라도 현재에 구멍이 난다면 미래는 오지 않는다. 대구 중앙로에는 주말이면 족히 수 만 명 이상의 유동인구가 몰린다. 이 시장에다가 우리는 우리의 책을 노출시켜야 한다. 노출은 교묘해야 한다. 밀당의 천재가 밀당 티를 내지 않듯이 말이다.
나는 주말이면 시내를 한 바퀴 산책한다. 우리가 만든 책을 멋들어진 새내기 대학생이 전공 교과서를 겨드랑이에 꽂고 걷듯이 가지고 걷는다. 물론 암내가 나지 않게 잘 씻는다. 책은 소중한 거니깐. 어릴 때 배웠다. 책은 소중히 다뤄야 함을.
대구에 도착할 때 즈음 클레어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구 남문시장의 인쇄소 중 다행히 토요일에 하는 곳을 찾았고, 필름 인쇄를 부탁했단다. 1시간 안에 광고 자리에 필름이 부착된다는 다행스러운 소식까지. 2시간 내내 굳어졌던 김 디자이너의 얼굴이 다시 핑크빛으로 돌아온다.
다행이다. 되돌릴 수 있어서. 하지만 우리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삶의 연탄재를 태울지 생각해야 한다.
마이크를 고쳐 잡는다.
토니: "아마 이것이 제가 최근에 경험한 일 중 가장 깨달음이 컸던 일이 아닐까 싶어요.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까요?"
카메라는 돌아가고 다음 질문이 내게 주어진다.
기자: "조금 더 멀리 돌아가 볼게요. 왜 출판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