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굳어버릴 때

'얼어붙음(Freeze)' 반응을 위한 아로마테라피

by 이지현

중요한 발표 중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을 때. 혹은, 갑작스러운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이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방금까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완전한 공백 상태. 주변의 소리는 멀어지고,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으며, 나는 마치 유리 벽 안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는 관객이 된 듯한 느낌. 이 순간, 우리는 종종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었을까?"라며 스스로를 탓하지만, 이는 당신의 지능이나 대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신경계가 감당할 수 없는 위협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린 극단적인 조치, 바로 '얼어붙음(Freeze)' 반응의 시작입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한 '얼어붙음'의 순간, "정신 차려!", "움직여!"와 같은 이성적인 명령은 더 이상 뇌에 닿지 않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생각의 과정을 건너뛰고, 멈춰버린 신경계에 직접 '다시 시작' 신호를 보내는 감각적 개입입니다. 향기는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특정 향기는 우리의 원시적인 뇌를 부드럽게 깨워, 얼어붙은 몸과 마음에 다시 따뜻한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고,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향기라는 온기를 사용하여, 당신의 '얼어붙음' 반응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함께 탐구해 보겠습니다.




'얼어붙음'의 정체: 내 몸의 가장 오래된 생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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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을 때

우리의 신경계는 위협을 마주했을 때, 기본적으로 '투쟁 도피'반응이 일어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는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사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교감신경계의 활성 반응입니다. 하지만, 싸우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하고, 도망칠 길은 막혀있는, 즉 저항도 회피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압도적인 위협 앞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이때 우리의 신경계는 마지막 생존 카드, 즉 '얼어붙음(Freeze)'을 선택합니다. 이는 에너지를 극도로 보존하고,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며,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가장 원시적인 방어기제입니다. 야생의 동물이 포식자에게 붙잡혔을 때 죽은 척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스티븐 포지스의 다중미주신경이론(Polyvagal Theory)

이 '얼어붙음' 반응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론이 바로 스티븐 포지스 박사의 '다중미주신경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자율신경계는 세 가지 단계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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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측 미주신경(Ventral Vagal) 상태

가장 진화된 최신 시스템으로, '안전하고 연결된'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때 편안함을 느끼고, 타인과 원활하게 소통하며, 창의성을 발휘합니다.


교감신경계(Sympathetic) 상태

위험을 감지하면 활성화되는 '투쟁-도피' 모드입니다. 심장이 뛰고, 에너지가 동원되며, 행동을 준비합니다.


배측 미주신경(Dorsal Vagal) 상태

압도적인 위협 앞에서 활성화되는 가장 원시적인 시스템으로, 바로 '얼어붙음' 또는 '셧다운' 상태입니다. 심박수와 호흡이 급격히 느려지고, 몸의 대사가 최소화되며,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해리(Dissociation) 현상이 나타납니다.


왜 초민감자는 더 쉽게 얼어붙는가?

초민감자의 신경계는 위협에 대한 민감도가 매우 높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벼운 스트레스나 갈등으로 느껴지는 상황도, 우리의 뇌는 '압도적인 위협'으로 해석하여 배측 미주신경 시스템을 더 쉽게, 그리고 더 자주 활성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을 때 무시당하거나,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있다면, 신경계는 갈등이나 불확실성 자체를 생존 위협으로 학습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깊은 정보 처리' 특성으로 인해, 갈등 상황의 모든 부정적인 가능성을 순식간에 시뮬레이션하고 그 결과에 압도되어, 싸우거나 도망칠 에너지를 모으기도 전에 곧바로 '얼어붙음' 모드로 직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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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아로마테라피스트 이지현입니다. 법학과와 스포츠의학을 전공한 뒤, 현재는 국제 아로마테라피스트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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