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겨울 빨갛고 따뜻한 한잔
유럽의 겨울 거리를 걷다 보면,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뱅쇼는 레드 와인에 과일과 향신료를 넣어 천천히 끓이면서 알코올을 날리고 향을 깊게 우려낸 겨울 음료다. 뱅쇼의 매력은 와인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향신료에서 비롯된다. 시나몬이 주는 포근한 온기, 클로브의 강렬한 향, 스타아니스의 신비로운 단맛은 단순한 풍미를 넘어 차가워진 몸을 녹이고 면역력을 지키며 겨울철 우울함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글에서는 뱅쇼에 들어가는 향신료들을 식물학과 화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향의 조화가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뱅쇼를 끓일 때 가장 먼저 넣는, 그리고 가장 지배적인 향을 내는 향신료는 단연 시나몬(계피)이다. 나무껍질을 말려 만든 이 스틱은 끓는 와인 속에서 서서히 풀리며 뱅쇼의 전체적인 온도를 결정짓는다.
시나몬 특유의 맵고 단 향기는 신남알데하이드(Cinnamaldehyde)라는 성분에서 비롯된다. 이 성분은 뱅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천연 감기약으로 불리는 이유가 된다. 신남알데하이드는 섭취 시 말초 혈관을 확장시키고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하여 체온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 뱅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손발 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것은 알코올 때문만이 아니라 시나몬의 이러한 발열 작용 덕분이다.
뱅쇼에 사용되는 시나몬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두껍고 거친 껍질의 카시아 시나몬(수정과 맛)은 매운맛이 강하고 향이 묵직하여 와인의 떫은맛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반면, 얇은 껍질이 겹겹이 말린 실론 시나몬은 향이 훨씬 섬세하고 달콤하며 부드럽다. 고급스러운 풍미를 원할 때는 실론을, 강렬한 온기를 원할 때는 카시아를 선택하거나 두 가지를 블렌딩하여 향의 층위를 넓히기도 한다.
시나몬의 향기는 심리적으로 가정의 따뜻함이나 안전함을 연상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추운 겨울, 외부의 혹독한 환경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또한 시나몬 향은 식욕을 조절하고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어, 겨울철 과식을 예방하고 속을 편안하게 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시나몬이 넓게 퍼지는 배경음이라면, 클로브(정향)는 톡 쏘는 고음의 악센트와 같다. 못 처럼 생긴 작은 꽃봉오리는 아주 소량만으로도 와인 전체의 향을 지배할 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클로브 향기의 핵심은 유게놀(Eugenol) 성분이다. 치과에서 맡을 법한 소독약 냄새와 유사한 이 향기는 실제로 강력한 살균 및 국소 마취 효과를 지닌다. 겨울철 목이 따끔거리는 인후염이나 편도선염 초기 증상이 있을 때, 클로브가 우러난 뱅쇼는 목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고 구강 내 세균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그 강력한 항균력이 뱅쇼 안에 녹아 있는 것이다.
클로브는 향신료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성질을 가진 것으로 분류된다. 소화기계를 강하게 자극하여 위장을 덥히고, 소화 불량이나 배앓이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차가운 와인을 끓여 마시는 뱅쇼의 특성상, 클로브는 와인의 찬 성질을 중화시키고 몸속 깊은 곳까지 열기를 전달하는 기폭제 역할을 수행한다.
클로브는 향이 매우 강하고 자극적이어서 사용량 조절이 관건이다. 와인 한 병에 3~5개 정도만 넣어도 충분하며, 너무 많이 넣으면 혀가 얼얼해지거나 와인 본연의 과실 향을 덮어버릴 수 있다. 오렌지 껍질에 클로브를 꽂아 끓이면 향이 너무 강하게 우러나는 것을 방지하고 은은하게 퍼지게 할 수 있다.
별 모양의 아름다운 외형을 가진 스타아니스는 뱅쇼에 동양적인 신비로움과 독특한 달콤함을 더해주는 향신료이다. 서양의 아니스(Anise)와 비슷한 향을 내지만, 목련과에 속하는 전혀 다른 식물의 열매이다.
스타아니스의 주성분인 아네톨(Anethole)은 설탕과는 다른 종류의, 묵직하고 끈적한 단맛을 낸다. 흔히 감초 향이라고 표현되는 이 향기는 뱅쇼에 설탕이나 꿀을 적게 넣어도 충분히 달콤하게 느껴지도록 돕는다. 시나몬과 클로브의 스파이시함이 자칫 날카롭게 느껴질 수 있을 때, 스타아니스의 둥글고 부드러운 단향이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스타아니스는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원료 물질이 추출되는 식물로도 유명하다. 민간요법에서는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제거하는 거담제로 사용되어 왔다. 뱅쇼에 스타아니스를 넣는 것은 단순한 향내기를 넘어, 겨울철 호흡기 면역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따뜻한 증기와 함께 흡입되는 아네톨 성분은 코와 목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느낌을 준다.
엄밀히 말해 향신료(Spice)는 아니지만, 뱅쇼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과일, 그중에서도 감귤류의 껍질이다. 와인에 넣고 끓일 때 과육보다는 껍질에서 나오는 에센셜 오일이 향의 핵심이 된다.
오렌지와 레몬 껍질에는 리모넨(Limonene) 성분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다. 끓이는 과정에서 열에 의해 껍질 속 오일 주머니가 터지며 뱅쇼에 녹아든다. 이 시트러스 오일은 무거운 스파이스 향들(시나몬, 클로브) 사이에서 가볍고 산뜻한 탑 노트(Top Note) 역할을 하여, 뱅쇼가 너무 약 냄새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상큼한 뉘앙스를 부여한다.
와인을 끓이면 알코올(에탄올)이 먼저 증발한다. 이때 알코올과 함께 가벼운 휘발성 향기 성분들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며 공간 전체를 뱅쇼 향으로 채운다. 반면, 무거운 향신료 성분들은 와인 속에 남아 농축된다. 뱅쇼를 마실 때는 알코올 도수는 낮아져 있지만, 향기 성분은 생와인보다 훨씬 고밀도로 응축되어 있어 적은 양으로도 강렬한 후각적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뱅쇼 한 잔에는 겨울을 이겨내려는 인류의 지혜와 미각적 탐구가 담겨 있다. 시나몬의 열기, 클로브의 보호, 스타아니스의 달콤함, 그리고 시트러스의 상큼함이 와인을 만나 어우러진다. 이 향신료들의 조합은 차가운 계절에 움츠러든 우리의 몸을 물리적으로 데워줄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풍성한 향기를 통해 마음의 허기까지 따뜻하게 채워준다. 뱅쇼의 향기를 맡는 것은, 춥고 긴 겨울밤을 견디게 하는 가장 향기롭고 우아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