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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과 고통의 세상살이

신체가 정신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by 노을

장애인이 되고 통증과 고통이 찾아왔다. 내 삶은 아픔으로 빠르게 물들었다.



물리적인 통증은 아프다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팔이 있으니까. 어느 날은 논리적인 이유로, 어느 날은 감성적인 이유로, 때로는 무작정 찾아오는 통증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 나의 경우는 오른팔의 절단 부위와 손끝에서의 고통이 가장 심하다. 게다가 내 팔이 내 팔이 아닌 느낌, 장갑 100개는 낀 듯한 답답함, 이것들도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내 의식이 깨어있는 동안에. 날씨에 따라서는 뼛속에서부터 느껴지는 가려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여기서 끝이라면 참 좋겠지만 다친 오른팔로 인하여 왼팔에도 통증이 온다. 양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왼손으로만 하다 보면 당연히 왼손에 무리가 오게 된다. 의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벌써 10년 차 3대 독자 며느리의 손목의 상태라고 했다. 고작 20살에. 딱딱한 어깨, 늘어난 인대, 염증 난 힘줄, 물혹만이 나에게 남았다. 한동안은 연필조차도 못 쥘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특히 수험생활 시절에는 통증이 심해서 공부를 하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친 오른팔보다 써야 하는 왼팔이 더 애틋하고, 더 신경 쓰인다. 부모님은 그럴 때마다 오른팔을 더 신경 써줘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항상 왼팔이 우선이었다. 왼팔마저 망가지면, 내가 쌓아 올린 나의 일상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모두 사라지게 되고 만다. 그래서 가끔 찾아오는 왼팔의 통증은 나를 좌절시킨다. 그럴 때가 되면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다. 그래서 겁을 먹는다. 오른팔을 한순간에 쓰지 못했던 것처럼, 왼팔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양팔의 통증은 우울과 좌절을 불러일으킨다. 통증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해결할 수도 없는 통증은 또 다른 우울과 좌절을 만들기 때문에 더 괴롭다.



물리적인 통증은 사실 임시처방이 가능하다. 휴식을 취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진통제를 먹거나, 망가진 손목에 약물을 주입하는 방법을 통해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특히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꿈을 포기하고, 항상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극복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등 장애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참 많았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점은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하고 싶은 것이든지, 얼마나 사소한 것이든지 간에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컵을 들고 싶다.’라는 욕구가 있을 수 있고, 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컵이 있다면 자연스레 두 손으로 들 것이다. 여기서 나의 욕구는 초점이 조금 다르다. ‘컵을 들고 싶다.’라는 욕구가 아니라 ‘두 손으로 컵을 들고 싶다.’라는 욕구, 즉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라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할 수 없기에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부정했다. 그래서 몰랐다,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대부분은 대신 들어줌으로써 나를 도와준다.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저 도움만 주면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실 두 컵을 옮기는 것은 한 손으로 두 번 반복하면 되는 일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타자를 치는 것도 지금은 300타 이상으로 두 손으로 치는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지인들은, 심지어 가족들도 도움을 주었으니 나의 욕구는 해소되었다고 인지해버린다. 협력하여 방법을 알아보고 "스스로" 해결하는 것과 타인이 대신해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부터 정신적 고통은 시작되었다.


나의 꿈은 초등교사였다. 다치고서도 초등학교 교사가 꿈이었다. 그리고는 좌절에 빠졌다. 내가 본 초등학교 교사는 두 손을, 양팔을 다 써도 버거울 때가 많았다. 성장기의 아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꿈을 포기하자니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꿈을 이루려 하자니 너무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교적 가벼운 우울함에 빠져있을 때, 나는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장애가 아닌 다른 것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도록 해야 나중에 장애 때문이었다고 억울하다고, 당당하게 화라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못해서 교사를 못하는 것이 아니야?’

‘네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스스로 노력해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듣는다면 너무 치욕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팔의 장애 말고는 다른 장애물들을 하나씩 없애보고, 그런 다음에 투정을 부리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고등학교 시절 나는 3년 내내 ‘놀고 싶다’라는 개념을 지워버렸다. 공부와 잠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랐고, 시간을 보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하지만 후회는 없는 그런 학창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꿈은 교사이다. 커가면서 중등학교 교사로 꿈이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공부를 했고, 결국 사범대도 들어갔다. 이렇게만 듣는다면 나는 성공스토리를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꿈을 포기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다른 꿈을 꾸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사를 오래 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선 교사가 되는 과정부터 험난하고 복잡하다. 임용고시생이라면 모두 느낄 것이다. 임용고시라는 시험의 장벽을 말이다. 하지만 그 장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제도상 특수교육대상자(장애인) 전형으로 교사를 따로 뽑는다. 현실적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합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내 머리의 한계를 알고 있으나 문턱이 낮춰진 시험은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면 무슨 걱정이냐고 묻겠지만, 내 걱정은 그다음부터다. 교사가 된 이후, 내가 교사의 업무를 물리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고민은 대학교 때 했던 면학 근로로부터 시작되었다. 용돈벌이를 하기 위해 시작한 가벼운 아르바이트였다. 그저 걸레로 책상을 닦고, 청소를 조금 하는 등의 잡일을 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15분이면 다 하는 일이었다. 일상을 보내는 것과 더불어 그 잡일을 정확히 3개월간 하고 나니 손목에 바로 무리가 왔다. 병원을 가니 또다시 손목에 물이 차고 힘줄이 늘어나고, 염증이 났다고 했다. 휴식만이 답이라고 했다. 그 순간은 지금 당장 느껴지는 아픔보다 미래가 걱정되었다. 아무리 배려를 받아도 내가 해야 하는 업무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을 감당할 몸이 되는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휴직을 하면서, 무리가 가지 않게 해도 10년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이다. 정년퇴임은 나에게 기적과도 같을 것이고, 로봇 의수를 어쩌면 왼팔에 먼저 필요할 수도 있을 만큼 내 팔은 한계치이다. 이제는 퇴행성 관절염이라는 질병을 반 오십에 달고 산다. 참으로 손의 관절들을 많이 써버린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들은 남들보다 일찍 꿈을 포기하게 된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닌 장애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은 사람을 더욱더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아갈 힘도 빼앗아버린다. 나아갈 가능성이 사라졌으니까.


사람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는데, 상처 입은 나는 무엇도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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