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정도...?
나는 세 가지 상황에서 내가 장애인임을 깨닫는다.
그 첫 번째는 병원에 있었을 때다. 사고 직후, 12년을 오른손잡이로 살아온 나에게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과 같았다. 게다가 왼손조차도 링거를 맞고 있어 생활은 더 자유롭지 못했다. 밥 먹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도 혼자 하기 버거웠다. 갑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모든 일을 해주어서 편했지만,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은 다치고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재활 치료를 해도 내 오른팔이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신경이 절단되면, 신경을 접합해도 재활에는 수년이 걸린다.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낫지 않기도 하는 것이 신경이었다.
하지만 커서 그 사실을 깨달았고, 나는 이미 지쳐버렸다. 과거의 재활 치료를 하는 동안, 이 사실을 나도, 부모도 몰랐다. 의사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불가능성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은 천천히 지쳤을 것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너무나도 화가 났다.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무지는 잘못이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가장 쉬운 나를, 장애를 탓했다.
치료 시기를 놓친 나는 먼저 치료를 포기하게 되었다.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 에너지를 투자할만한 더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평생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위질이나 칼질, 설거지 같은 일들도 결국 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것. 나는 성공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치료에 투자하였다면, 나는 훨씬 뒤에나 지금의 모습을 얻었을 것이다. 때로는 치료를 포기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더 포기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장애인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는 가족과 있을 때이다. 이제는 딸과 마트에서 장을 봐도 자신이 모든 짐을 드는 엄마, 제사와 차례를 준비할 때만 되면 나르던 음식을 더 이상 나르라고 하지 않는 아빠, 다친 동생에게 욕을 하는 오빠를 보고 나는 내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무거운 것을 들기에는 벅찬 한 손이 되었구나, 나는 한 팔이 병신인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부모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나에 대한 배려였다. 나도 그것을 안다. 그리고 배려해주시는 것이 고맙다. 하지만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의 존재 가치, 이용가치가 사라져 가는 일상을, 배려를 보면서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없었다. 그 와중에 오빠는 나에게 장애인이라는, 병신이라는 도장과 낙인을 찍어주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소독약의 치료 없이, 누군가의 사과 없이 스스로 덮여졌지만 그 속은 여전히 화를 내지 못할 때마다, 지나가는 욕을 들을 때마다 염증이 나고, 문드러졌다.
마지막으로는 학생 때다. 청소년기,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이다.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공부로 뒤덮인 삶을 보냈다. 내 학창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조금 더 이성적이었고,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갓 10년을 넘게 살아온 아이의 머릿속에서도 나는 몸을 쓰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몸을 쓰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씁쓸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머리를 쓰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꿈이 교사였다. 다행히 교사는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직업이었다. 좋은 현실은 아니지만, 공부만 잘한다면 교사가 될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국, 영, 수를 중시하는 학교 교육에서 나는 조금이나마 희망을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예체능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체육 같은 과목은 노력으로 승부를 보았다. 불가능한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매진했다. 할 수 있는 수행평가들은 따로 연습하여 결국 모두 최상위의 성적을 얻어냈고, 체육 과목우수상 또한 받아냈다. 그때부터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내기 시작한 때가. 그것이 공부에 한해서였지만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는 충분했다. 당당한 장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친구들과 있을 때면, 자신감을 잃어갔다. 친구들이 하는 당연한 것들을 나는 할 수 없었다. 잘 상상이 가지 않겠지만 아주 간단한 것들이다. 친구들과 당구를 치러 가는 것, 양손을 이용한 게임을 하는 것, 기타를 배우는 것,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 등 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보는 것뿐이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질 때 나는 좌절했다.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몰랐을 것이다. 왜 갑자기 놀기 싫어하고, 대부분 잘 안 놀러 다니는지 말이다. 소외되기는 싫지만 소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무엇도 할 수 없던 꼬마 아이였다. 내 친구들은 이기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려하는지조차 배워본 적 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러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또 탓할 것이 필요했다. 역시나 나는 또 나를, 장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자책에 나는 억울했다. 하지만 계속된 외부 자극은 현실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회를, 교육을 바라보았다. 장애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던 사회를,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던 교육을 원망했다. 그래서 직접 가르치고, 바꿔보고 싶었다. 교사가 돼서, 직접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은 커져갔다. 딱 상처의 크기만큼. 그렇게 내 진로는 더욱더 확고해져 갔다. 나와 같은 성장기를 겪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며, 할 수 있었던 공부에 매진했다.
사실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이, 24시간 365일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은 아니다. 그저 때때로 비장애인들보다 아파야 할 일이 더 많고, 힘내야 하는 일이 더 많고, 좌절해야 할 일이 더 많을 뿐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862749?OzSran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