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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만의 일

장애인이 되는 것 vs 장애인의 가족이 되는 것

by 노을

장애는 내 일이 될 수도, 내 주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일은 될 수 없다. 내일의 나를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그리고 장애인이 된다는 것과 장애인의 가족이 된다는 것 중에 당연히 전자가 더 고통스럽고, 힘든 일 일거라 생각했다. 내가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가 장애를 얻었다. 그렇게 나는 장애인이자 장애인 가족 구성원을 두게 되었다.


장애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장애를 가진 아빠는 낯설고 어색했다. 내가 아는 아빠와 다른 아빠가 되어 내 눈앞에 있으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항상 나에게 도움을 주던 사람이, 이제는 나의 도움이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워있는 아빠를 보면 항상 힘들었다. 아빠를 보면 마치 내가 나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내 팔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아빠의 팔과 다리를 보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누구도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사랑했던 아빠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나의 장애를 아직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아직도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남아있다는 것을. 여전히 나는 내 팔을 싫어한다는 것을.



신체장애로 아빠는 많이 달라졌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기억상실로 인하여 교통사고 이전 나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고 이후 내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달라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장애가 남을 정도의 사고라면 큰 사건이니까. 그렇게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이고, 힘으로 몰아붙이던 아빠는 힘을 잃었고, 이기적일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아빠가 자라지 않는 아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변해버린 아빠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게는 아직도 과제로 남아있다. 아빠를 떠올리면 항상 두 가지의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른다. 다치기 이전의 아빠와 다친 이후의 아빠 모습 사이에서 나는 괴리를 느낀다. 거기서 오는 혼란을 나는 아직도 감내하지 못한다. 예전의 아빠가 그리워서. 강할 줄만 알았는데 너무나 달라져 버린 아빠를 볼수록 나는 무너져 갔다.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아빠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도 한쪽 팔을 못 쓰면서 말이다. 추가적인 의문도 생겼다. 항상 도움을 받는 것과 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과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두 처지를 모두 경험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 경험과 지식을 아빠를 간병하는 엄마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어떤 증상들이 올 수 있고, 이런 점이 아빠나 엄마에게 힘들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의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엄마는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았다고 한다. 즉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빠와의 대화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재활치료를 하고 있는 아빠에게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고, 장애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힘들어도 재활을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걷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전자는 결국 미래보다는 현재를 살아가자는 말이고, 후자는 현재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자는 말이다. 사실 둘 다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적어도 나는 안다. 둘 다 경험해보았고, 무엇을 해도 후회가 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어떤 말도 하기가 힘들었다. 그 어떤 말도 아빠의 고통에 답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대화하는 것부터 나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아빠가 낫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팔도 낫지 못하리라 생각하는데, 하물며 아빠의 장애가 쉽게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정확히는 아빠가 다시 걸을 수 있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바라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걷는 아빠가 상상되지 않는다. 걷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더 많은 재활을 견뎌야만 가능한 미래라서. 남들에 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아빠를 보며 나는 더 의문이 늘어간다. 재활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서.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빠는 재활 치료를 하고 싶을까?


이것은 ‘걷고 싶다’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팔을 쓰고 싶지만, 재활 치료는 하고 싶지는 않다. 사고 직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재활을 거부하고 있다. 나아질 미래의 나보다 힘들어하는 현재의 내가 더 우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 나아도 괜찮은 삶을 살고 싶다. 아빠는 무엇을 바랄까?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예전과 다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아빠가 솔직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답을 듣지 못한다. 약하면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서, 어떤 것을 약하다 여겼는지 뻔히 알기에,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이 물음이 아빠에게 더 고통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장애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때로는 사회가 장애를 규정함으로써 비장애인들이, 가족들이 낫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장애를 인정하거나 극복하는 선택지 밖에 없을까? 장애가 사라지게 되는 꿈을 꾸는 것은 비현실적인가? 그렇다면 왜 장애를 분류하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는가? 왜 사람들은 여전히 장애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장애는 당신의 앞에도, 옆에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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