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공론은 이제 그만.
웹툰 <나는 귀머거리다>에 공감 가는 문구가 있었다.
한 국가의 복지 수준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지체장애인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나라에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지체장애인 수는 몇 명이나 될까? 길거리가 아니어도 좋다. 한국에 살면서 1년에 몇 명의 장애인을 보았는가? 나의 경우에는 10명 남짓인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다고 해도. 그렇다고 장애인의 수가 적은 것일까? 아니다. 그저 장애인이 이동하기에, 살아가기에 어려운 국가일 뿐이라서, 사각지대에 있는 것이다.
이동의 어려움에 대해 간단한 예를 들면, 지하철이라는 대중교통은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은 동행 보호자까지 총 2인 무료로,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은 본인 1인만 무료로 이용한다. 각 지역마다 대중교통 무료 카드나 복지카드를 통하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 지원을 해주니까 이동에 무리가 없는 것인가? 경제적으로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지하철을 이용할지 말지는 장애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을 생각해보자. 사람 한 명 서 있기도 벅찬 지하철이다. 하지만 장애인들도 출퇴근을 해야 한다면, 그들은 지하철을 타고 혹은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할 수 있을까? 매번 비장애인들의 불편한 눈길을 받으며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탈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휠체어석이 있는 칸까지 가기도 힘들다. 그 칸을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은 대낮에 시외로 나가는 지하철에서나 볼 수 있다. 지옥철에 휠체어라니, 가당키나 할까? 사실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기본권조차도 지켜지지 않은 국가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복지제도를 바랄 수 있을까?
현재의 복지제도까지 이르기에도 장애인들의 외침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저 소리 외침이 아닌 힘든 투쟁을 해서 얻은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너무 미비한 복지제도를 가지고 있다. 장애의 기준도, 그에 따른 혜택도 양두구육과 같다. 장애인이 갈 수 없는 건물에 장애인들을 위한 무료 문화 혜택이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며 배려일까? 이러한 복지는 장애인들에게 의미가 없다. 청각장애인이 영화를 보러 갔으나 자막이 없는 영화라면, 그 영화티켓의 가격이 얼마이든 무슨 관련인 것일까?
지금의 복지는 그저 비장애인들이 탁상공론하면서 만들어 낸 빛 좋은 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휠체어를 안 탔다는 이유만으로, 듣고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다. 장애인들과 같은 복지 아니, 더 나은 복지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필요한 복지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답하기 어렵다.
나는 운전을 하지만 하지 장애가 아닌, 상지 장애라는 이유로 장애인 전용 주차 칸에 주차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 장애인 전용 주차 칸이 하지 장애인에게만 필요할까? 주차를 스스로 해야 하는 상지 장애인들에게는 필요 없는 복지 혜택인가? 그렇다면 의족을 끼고 운전을 하는 하지 장애인에게는 꼭 필요한 복지 혜택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내가 가지는 이 모든 불만과 불평은 그저 편하게 살고 싶은 내 욕구일 뿐일까?
장애인 등급제도는 폐지되었다. 맞춤형 복지제도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복지제도가 말 그대로 ‘맞춤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필요하다면 등급별로, 유형별로 대표적인 불편함을 조사해서 복지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비장애인들이 만드는 장애인 복지제도가 아닌, 장애인들의 불편함이 반영된 장애인 복지제도가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장애인 복지제도의 변화를 보고, 듣고, 경험할 것이다. 오늘과 달리 그런 변화 하나하나가 좋은 변화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결국에는 장애인이 장애인임을 밝히고, 인정하고 누려야 하는 복지에 대해 당당히 요구하고 그것에 응할 수 있는, 차별이 없는 그러한 국가가 먼저 되기를 바란다.
그럼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 개개인이 잘 살아가고, 잘 지내는 것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사회가 말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성공에는, 삶에는 훨씬 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누구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당연히 장애인 스스로의 노력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회가 말하는 극복, 내가 말하는 성취를 해낼 수 없다. 즉 그 노력이라는 것이 때로는 장애인 본인이 주어가 아닐 때가 많다. 장애인 주변이 희생해야 하는 경우, 그것 때문에 장애는 무섭고, 힘든 것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장애를 규정지은 사회가 노력해야 하는 것이 먼저인가? 장애를 만들어내고, 차별하는 개인의 노력이 먼저인가? 나는 먼저 희생하는 사회가 있어야 개인의 노력도 빛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장애인을 상징하는 기호에 변화가 있었다. 뉴욕에서 사라 핸드렌이라는 사람이 역동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장애인 기호를 보여주었다. 항상 도움을 받아야 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를 가진 예전 기호로부터 변화를 추구한 것은 좋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던 나에게 맞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이미지가 불편했다. 수동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이 고민을 하기 시작할 즈음에 나는 장애청년드림팀이라는 대외활동에 지원했다. 이 활동에서 만난 한 비장애인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로 인해 밝혀낸 내 불편감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장애인의 경우는 도움이 필수적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바꾼다는 것은 진정 장애인을 위한 것일까? 역동적인 이미지로 바꿈으로써 조금 더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조금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은 장애인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장애인들에게는 필요한 도움을 받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먼저이지 아닐까? 아직 어떤 기호가 세상에 더 도움을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문화보다 도움이 필요한, 수동적이어도 된다는 문화가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도움에 대한 생각은 어찌 보면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역동적인 이미지도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중학교 시절 처음 체육 수행평가로 배구 토스를 시험 보기로 되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연습했다면 나는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지만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나는 배구공을 사서 집에서 따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손목을 살짝만 눌러도 아플 정도로 연습했다. 결국 그 수행평가에서 최고의 성적을 얻었다. 좋은 일이었고, 이미지 변신에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육도 열심히 하는 역동적인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다. 나는 역동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항상 유지했어야 했다. 덕분에 나는 체육 수행평가에 해당하는 종목의 물품을 다 사서 따로 연습을 했다. 조금이라도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에 휩싸였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 그것은 비장애인의 사회나 장애인의 사회나 동일하다. 그러니 역동적인 것, 수동적인 것보다는 도움에 대한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862749?OzSran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