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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

심리 치료 – 사이코 드라마

by 노을

항상 심리상담에서 말로써 표현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여러 치료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러다 웹서핑 중 한 블로그에서 무료로 하는 심리극을 발견했다. 일명 사이코드라마라고 불리는 집단치료였다. 경력이 짧거나 수련생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가 오랫동안 진행하던 심리극이었다. 찾아보니 서울권에서 이런 무료 심리극은 흔치 않았다. 그렇게 나는 사이코드라마를 경험하게 되었다. 워밍업이라고 불리는 몸풀기 단계, 주인공을 뽑고, 그에 해당하는 본 극이 진행되는 단계, 마지막으로 관객들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마무리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관객으로서 지켜보기만 했다. 나에게 안전한가를 판단했어야 했다. 항상 개인 심리상담에서 감정을 펼쳐내고, 수습하지 않던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차례를 더 갔었다. 1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은 워밍업부터 본 극까지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가상의 공간이기에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괜찮을 거라는 인식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험하다면 말릴 수 있는 전문가까지 있다면, 조금 더 안심되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나니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을 하고 싶었다. 관객으로 계속하여 참여하다가 처음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빠를 향한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가상의 아빠와 나눈 이야기는 과거의 일에 대한 것들이었다. 답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도 매번 궁금했다. 왜 나에게 그랬던 것인지. 과거의 아빠가 했던 폭력적인 행동들과 가족에게 보였던 무관심했던 태도들, 학원 운전기사를 마음대로 용서한 것 등 분노의 감정이 일어났던 사건들을 나열하고 이야기했다. 현실에서는 말하지 못할, 속에 묵히고 묵힌 이야기 했다. 언제고 매번 상상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 답답함이 해소되고, 분노는 점점 올라왔다. 그러면서도 나는 화를 내면 안 된다고, 그럴 자격이 없다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감정은 분노에서 미안함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분노와 미안함이 공존했을 때,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상반되는 감정을 다루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에 디렉터는 미래의 아빠 장례식 장면을 진행해보자고 했다. 분노와 미안함은 한순간에 슬픔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화가 났던 것보다, 내가 해주지 못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내가 가졌던 아빠에 대한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뒤늦게 올라온 복잡한 감정은 또다시 시간에 이끌려 강제로 마음속에 가둬야 했다.


그렇게 주인공을 한 차례 해보고 사실상 실망을 더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도 회복과 추락을 여러 차례 경험하면서 나에게 있던 폭력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베개를 던지거나 하는 습관들이 생겨버렸다. 분노를, 답답함을 해소하는 것이 말로써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나는 1년이 지나서 그나마 재현 가능한 공간이던, 소리라도 지를 수 있던, 사이코드라마를 다시 찾아보았다. 가장 빠른 사이코드라마 일정이었던 대전에서 진행하던 한 슈퍼비전 사이코드라마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주인공에 도전했다. 운 좋게 주인공으로 선정되어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만날 수 없는 운전기사를 다시 만나 사과를 듣고 싶었다. 분노를 삼키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서 분노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여기서는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전문가는 부모님을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운전기사를 만나는 장면을 구성하였다. 부모님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감정적으로 많은 것이 올라왔다. 특히 엄마를 향해 떠돌던 감정들을 말로 내뱉는 순간 깨달았다. 그것은 분노였음을. 그렇게 엄마에 대한 분노는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으로 변하고, 한참을 울면서 그 장면 속에 빠져있었다. 나는 현실에서 낼 수 없는 화를 바타카를 통해 감정을 표출하고, 소리를 지르며 표현했다. 처음으로 잘 이루어진 사이코드라마였다. 모든 기력이 빠지고, 한동안 멍했다. 비록 운전기사를 만나는 장면을 하지 못했지만, 그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했던 장면임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나는 운전기사보다, 더 오랜 세월을 부모님과 지내면서 더 상처를 받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차만큼이나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도 무서움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감정을 알고 있을 때와 표현했을 때는 확연히 달랐다. 누적되는 감정들은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쌓이기만 했다. 쌓인 감정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다른 감정으로 변하고, 속으로 숨어버린다. 확실히 나는 감정을 알고만 있었다. 한 번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숨어버린 감정을 찾으러 헤매기만 했다. 감정이 느껴지면 항상 버거웠고,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과 그에 따른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된 계기였다. 감정을 표출하고 나서 달라진 것은 크지 않다. 사실 여전히 나에게 가족은 힘들고, 감정은 벅차다. 표현은 서툴고, 감정에 솔직해지기 힘들다. 그러나 누적되었던 감정은 조금 옅어져 갔다. 또다시 쌓이겠지만, 줄어든 만큼 스스로 괴롭히는 일이 줄었다.


단기간에 직접적인 효과를 보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치료였다. 그리고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 훨씬 카타르시스가 크다고 느꼈다. 단순히 말뿐인 것을 넘어선 심리 치료니까.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한다고 몰입이 안 될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빈 의자보다 직접 보이는 사람이 있고, 내가 들었던 말을 다시 듣게 해주는 그런 장치에 불과하니까. 심리상담에서 효과를 보지 못했거나, 과거 특정 장면에 직접적인 분출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이 치료방법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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