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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아가는 이유

나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자.

by 노을

나의 유일한 자랑은 성실함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성실은 내 삶의 키워드였다. 나다운 것이 성실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성실하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성실했다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는 성실하다고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믿음이 깨진 원인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성실하고 싶지 않다. 성실하다고 자부한 삶이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이 아니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노오력’만 했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나다운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특성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각과 말이 갖는 힘은 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논에 있는 벼들을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쌀로 바뀌고, 그 쌀이 밥이 되어 우리 눈앞에 있다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밥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니까. 나는 우리가 어떤 정보를 생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벼들이 쌀로 인식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쌀은 그때부터 가치를 가지게 된다. 즉 생각은 가치가 있다. 쌀이 밥으로 변하면 그 가치가 상승된다. 눈에 보이는 양식이, 귀에 들리는 말이 되어 현실로 다가온다. 그래서 말을 할 때 항상 조심한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들은 말로써 잘 꺼내지 않는다. 말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내가 대학생이 된 후,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빈말을 듣게 된다. 나는 그런 빈말이 싫었다. 의미 없는 말을 굳이 왜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믿고, 기대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함부로 ‘밥 한 번 먹자’, ‘놀러 가자’는 소리를 진심이 아닌 빈말로 꺼내지 않는다.



나에게 도전, 경험, 부딪힘 등의 행동은 중요하다. 말 이상의 것이다. 무엇이든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무엇을 해도 후회,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말을 한다.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변화하려면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 항상 더 나아지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해보려 한다. 무엇이든 얻는 것은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객기를 부릴 만큼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더 심하게 노력한다. 물론 잃는 것도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타인을, 마음을, 체력을, 감정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것들도 또다시 무엇인가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런 가치관은 경험과 추억을 남길 것이다. 경험은 나를 성장시켜줄 것이고, 추억은 나를 지탱해줄 것이다.



나는 말과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온전히 나답게 산다는 것이 말과 행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이런 내가 살면서 말을,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바로 오빠이다. 무엇도 하지 않으려는 것은 내 가치관과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이 관계는 여전히 나에게 골칫덩어리지만, 처음으로 노력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에 어떤 일이 더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일이 있긴 있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사고 이전의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과거의 일은 오빠와 성추행 사건이다. 게임을 빌미 삼아 나를 부르던 장면.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그리고 오빠가 나를 만지는 장면. 울면서 누군가에게 오빠가 날 괴롭힌다고 말하는 장면. 할머니가 오빠와 단 둘이서는 방에서 놀지 말라는 장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억의 잔해물이다. 물론 이 기억이 왜곡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해리성 기억상실임에도 불구하고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기억이든, 아니든 내가 이런 생각이 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무의식에 각인된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나도 싫지만,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다운 특성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답다는 것도 내가 정해둔 하나의 틀에 불과한 생각이 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다운 것을 알아가는 것보다 나는 어떤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그 누구도 나에게 정확하게 답해주지 않은 질문이 있다.


‘당신은 왜 사는 것이죠?’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요?’

‘나는 왜 살고 있을까요?’


내가 수없이 던진 질문들이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는 쉽게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사는지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답을 하기 위한 답으로 말하자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세포들은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들의 DNA에 박힌 본능. 이유가 없는데 이유를 찾으려니 찾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고통이 와도 이 본능은 강하게 작용한다.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 참으로 야속하다고 생각한다.


그 야속함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쳐주자. 지금 당신에게 살아있어서 고생이 많다고 말해주자. 그렇게 살아남아서도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삶에서,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삶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정면으로 봐주자.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 도대체 얼마나 귀중하기에. 심지어 제 아무리 고통이 와도, 이길 수 없는 시련이 오지 않는다며 우리는 살라고 강요받는다. 시련이라는 의미가 가벼워진 건가? 어쩌면 우리는 너무 흔하게 시련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은 아닐까? 비슷한 의미에서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정말 죽고 싶을 때 써야 만이 그 위험성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치기 소년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사람은 힘들 때 죽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힘들 때는 힘이 든다는 생각도, 죽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다. 힘이 드는데 그것을 버텨야 하는 이유를 모를 때, 즉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를 때 죽으려 한다. 나는 이 질문에 본능이 아닌 의식적인 이유로 답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고통 속에서, 삶 속에서 죽음을 꿈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질문의 답을 고심하듯이, 이 책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에 어떤 고통이 와도 견딜 수 있게. 나는 여전히 당신이 나와 같은 삶을, 아픈 삶을 살지 않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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