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없는 것이 정답이다.
죽음.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것.
당신도 해당하는 슬프고도 기쁜 진리.
태어난 이상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죽음과 살아있음이 공존하는 공간, 장례식장. 살아있음이 가장 슬프게 느껴지는 시공간에 들어가면 우리는 그 슬픔 속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와 배려를, 배우지 않아도 본능처럼 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는다. 그 순간에 누군가는 애도를 하지만, 누군가는 오열을, 누군가는 침묵을 한다. 하지만 장례식장은 그 모든 것이 이상하지 않고 당연한 공간이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새벽에도, 보이고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들의 냄새.
어쩌면 그것이 유족의, 조문객의 마음들이 넘쳐흐른 것일 수도 있겠다.
가장 멀리 두고 싶고,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던 ‘죽음’에 직면하는 너무나도 약하고 여린 우리들의 모습은 그곳에 존재한다. 참혹하게 아픈 그 공간에서 서로서로 지지대가 되어 겨우겨우 공간을 꾸려나간다.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애도를 한다. 본능적으로. 이제는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구멍이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애도의 0순위니까. 하지만 그때를 놓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아팠다.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에 예절을 알아야 하고, 그 관계 회복 가능성에 대한 이별을 위해 장례식을 하고, 다 같이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기에 사별에 대한 애도는 단순한 관계 단절보다는 더 깊고, 진하고, 아프다. 경험에 의하면 물리적인, 신체가 절단되고 파손되는 것보다 아프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죽음’보다 애도가, 누군가가 다치는 것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훨씬 더 무섭고 아프다.
죽음은 감당되지 않는 상실감과 그리움, 무력감을 동반하여 따라온다. 그것이 사람을 지치고, 벅차게 한다. 이런 사별을 겪고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수험생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매우 냉정하고 차가운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서, 위로해주기 위해서 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삶을 살아본 선배로서 후배에게 해줄 수 있던 많은 의미가 내포되었던 말.
“끝이 있는 지옥은 지옥이 아니란다.”
수험생 시절, 그때가 지옥이었던 나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는 그런 구절.
사별을 겪은 지금, 끝없는 지옥에 놓인 나에게 좌절과 괴로움이 되는 그런 구절.
애도의 방식, 세상 사람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 말은 어쩌면 애도에 대해서 정답은 없다는 것을 뜻하거나, 애도의 정답이 한 개가 아니라는 것이거나, 매우 어려운 정답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각자가 각자를 위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슬퍼하는 방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기일을 기억하고, 납골당에 찾아가고, 유족을 챙기고, 혹은 그 사람을 떠나보내며 잊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간단히 분류한다면 기억하거나 잊거나. 그 이와 그 사람과의 추억을. 무엇을 기억해야만 하고, 잊어야만 하는지 정해진 것은 없다, 무엇이 맞는 애도인지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각자에게 맞는,
각자가 하고 싶은 애도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정답이다.
그러니 그것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지 마라. 그 어떤 것이어도 당신이 아프지 않은 애도는 없으니까. 그 모든 것이 애도일 테니까. 그러니까 걱정도, 불안도 하지 마라. 당신이 하는 그 애도도 충분히 좋은 애도일 테니까. 믿어라. 당신을 좋아했던 그 사람을, 그 사람이 의지했던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