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상실 이후에 오는 것.
애도 : “슬퍼하고 슬퍼하다.”
슬퍼하는 것의 대상은 다양하다. 애도의 방식도 다양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상실하였느냐에 따라 애도라는 작업의 색깔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다양한 애도가 필요하다. 흔히 사별의 경우만 애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것을 상실한다. 자신의 신체를, 사람을, 반려동물을, 감정을, 또는 물건을. 그중 여기서 다루는 ‘상실’과 ‘애도’는 사람에 한정한다.
애도 이전에, 상실 이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죽음’
이다. 애도라는 것에는 분명 죽은 이가, 조금 넓게 본다면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가 필요하다. 더 넓게 본다면 관계가 끊긴 이와 끊은 이가 필요하다. 애도를 이야기하기 전에 죽음과 관계, 이 두 가지를 우선 분리해야 한다. 분명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었다는 것과 관계가 끊긴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 역시 관계가 끊긴 일부라 볼 수 있겠지만, 관계 회복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관계 회복의 0.01% 가능성마저 빼앗아 가는 것이 죽음이다. 관계라는 것은 틀어질 수 있지만 돌이킬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전제를, 그 관계를 파탄 내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관계 단절과 죽음의 측면에서 그 사람과 나에게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은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의 관계 단절에는 미래가 없는 것 뒤에
일말의 기적 같은 가능성이 있다.
다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는,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 내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 좁은 세상에서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가능성. 살아있기에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에는 그러한 모든 희박한 가능성마저 빼앗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누구의 죽음이든,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죽지 않은 이, 살아있는 이가 필요하다. 다시 이야기를 하자면, 애도에는 죽은 사람은 필요하지만 죽은 사람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쌍방의 관계에서, 핑퐁게임을 주고받다가, 한쪽의 선수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진 상대에 대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남은 선수를, ‘사람을 잃은 나’를 위해서 애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감정을 느끼지 못지만 살아있는 나는 뼈아픈 괴로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애도는
‘살아있어서 아픈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배운, 겪은 애도는 그러했다. 세상에 필요한 애도도 그러하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 그 자체? 아니면 그 사람과의 관계 단절? 한 생명체의 부재? 반 오십밖에 안 되는 나이에 내 삶의 절반을 같이 보낸 친구와 사별도 해보았고, 소중한 친구와 관계가 단절된 경험도 있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보호자)의 부재도 경험했다. 각각 사람이 다르고, 서로 간의 관계가 다르기에 비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한 사람과의 관계 단절과 내 옆에 필요했던 보호자의 부재는 분명 죽음과는 달랐다. 사람의 부재는 대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해준다면 빈 공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보호자의 역할을 할머니 대신 부모님이 대체해준 것처럼. 소중한 다른 친구를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만드는 ‘죽음’은 그 어느 것의 대체 가능성도,
그 어떤 관계 회복성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