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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Sep 25. 2023

당신의 신체적 건강은 어떤가요?

renewal.1 변화된 관점

누구도 장애인이 될 줄 모르고 산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뜸 내 앞에 다가온 시련을 당신은 어떻게 견딜 것인가? 세상에 다양한 시련이 있지만, 한 번의 고통으로 여러 괴로움을 파생하는 것은 장애가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아, 이번 글에서는 신체적인 장애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굳이 나누는 이유는, 통증과 고통은 다르기에. 그럼에도 다시 또 같이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몸과 마음은 이어져있고, 같은 톱니바퀴에 맞물린 시스템이기에.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살면서 신체적으로 다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매우, 엄청, 운이 좋아서 다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해도, 누구나 늙어가면서, 망가지기 마련이다. 누구도 노화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지금 신체가 건강하다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자신이나,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이 건강을 잃기 전에는 진정 깨닫지 못하는 축복이다. 하지만 건강을 평생 잃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 나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나아가는 것은 좋아하는 반면 어렵다. 하지만 아프고, 늙어가고, 망가지는 것은 싫지만 쉬운 일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프지 않고, 늙지 않으며, 망가지지 않으면서 성숙해지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 정확히는 어떤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까? 다치기 전만 해도, 아니 다치고 나서도, 나는 성숙과 발전에 시야를 돌리며 살아왔다. 그것이 맞는 길이고,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가지 못해 나는 고꾸라졌다.

 성숙과 발전에 초점을 맞춘 삶은 바쁠 수밖에 없다. 모든 경험은 내가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이니까. 그리고 결국 아픔과 망가짐은 쳐다보지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다. 발전하기는 했으나, 망가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에 있어서든 균형이 중요하다지만, 아픈 것을 다시는 느끼기는 싫었다. 하지만 외면한 만큼, 존재감을 드러내는 망가진 나는 날뛰기 시작했고, 살아가면서 꼭 성숙과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모두는 아플 것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비 온 뒤 땅이 굳고, 더 단단해진다 해도, 우리는 아프기 싫어한다.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최선의 노력으로 가장 덜 아픈 것을. 최악만큼은 피하면서. 왜냐면 태어난 이상 아파가는 삶을 살아가기에. 그렇다고 너무 끔찍하니까, 싫을 수밖에. 내가, 내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피하고 외면하고 싶다. 그 아픔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장애라면, 더욱더. 대비를 하진 못하더라도, 외면은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 아쉽게 이 글은,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정답이 될 수 없는 글일 것이다.

 사람마다 건강을 잃는 과정, 그로 인한 고통, 필요한 현실적인 도움은 다를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의문만을 남길 수도 있다. 그저 개인의 이야기와 경험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적인 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당신이 장애에 대해서 한 번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서. 지금 장애를 가지게 되었든, 아니든 간에. 당신이 장애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이 혹은 가까운 타인이 장애를 입게 되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단 하나의 미래도 떠올릴 수 없어 막막할 때, 이렇게도 지낼 수 있다는 위로와 지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 삶은 계속된다.

 내가 뭐라고, 장애인의 정답과도 같은 삶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관찰한 방향성 하나는 말할 수 있다. 어찌 되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물론, 그 삶이 기쁘고, 감사하고, 희망적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고통만 준다는 비현실적인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견디기 어렵기도 하고, 때로는 시험당하기도 하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 여길 때도 많다. 그래도, 이 속에서 지금 당장 희망을 찾지 못해도, 당신은 결국에는 이전과는 다른 희망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1n 년간 길을 잃고, 또 잃고, 또 헤매본 경험이 있음에도, 나는 이 방향성을 너무 명확히 느꼈다.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삶이 계속되니까.



오른손잡이에서 왼손잡이로 탈바꿈해 처음으로 혼자서 밥을 먹게 되었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두 손을 쓰는 배구를 통해 학교에서 유명해질 때

왼손만으로도 타자를 300타 치며 과제를 하게 되었을 때

한 손으로 칼질을 서슴없이 하면서 요리를 하게 될 때



 나는 좌절 속에서 희망만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서 적어도 희망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공감하고 싶은가? 회피하고 싶지는 않은가?

 그러니 지금 떠올려보자. 만약 당신이 장애인이 된다면? 그 삶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너무 머나먼 미래일 것만 같고, 혹은 자신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가? 그저 멀게 느끼고 싶은 일인 것은 아닐까? 만약 당신이,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 장애를 갖게 된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있겠는가? 피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마음이다.



분명, 나는 당신보다 덜 불편할 수도 있고, 더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모두 괜찮다. 

누가 더 괴로운지 따져서 지금 뭘 하겠는가?



 그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으니, 당신도 "좌절"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만들어 주는 단 한 문장이 이 글에 있었으면 좋겠고, 그 말이 당신에게 진정으로 따뜻함이 되고, 현실적인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없었기에, 지금의 내가 결국 지금까지 버텨 낸 스스로에게도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어서 나는 또다시 적기 시작했다.



이 글이 

 어제의 당신에게 "공감"을,

  오늘의 당신에게 "위로"를,

   내일의 당신에게 "힘"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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