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알려주었다면 더 좋았을 일
처음 팔을 다쳤을 때, 나는 고작 5학년 초등학생이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온갖 것이 불편했다. 한 팔은 다쳤고, 한 팔은 링거를 맞고 있었다. 내가 편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밥을 먹을 때조차도 주삿바늘이 빠지거나 막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씻는 건 당연히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내게 허락된 것은 머리를 감는 것 정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듯이 누워서 머리를 감았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집에 왔는데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몰랐다. 한 팔로 어떻게 머리를 감는지 모르겠었다. 퇴원하기를 오랫동안 바라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겨졌다. 몸을 씻는 건 한 팔로도 했던 일이니까 별로 어렵지 않게 시작했지만, 머리는 항상 두 손을 써서 샴푸를 했고, 샤워기를 한 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털어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2년을 넘게 나는 엄마가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은 커가면서 감지했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로 그저 이상하다는 감각만 있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머리 감겨주는 것을 거절했다. 그것이 중학생이었을 때 일이다. 어떻게 감아야겠다는 생각은 그저 감겨줄 때부터 했다. 엄마 역시 샤워호스를 고정시켜 두고 머리를 감겨주었으니까. 나도 그걸 따라 했다. 처음에는 분명 어려웠다. 안 쓰던 팔의 근육들을 쓰기 시작했고, 머리를 감는 건 내게 중노동에 가까웠다. 씻는 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머리 감는 시간은 남들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남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야 했고, 머리를 말리는 일은 수건이 전부였다. 드라이기를 쓸 생각조차도 못했다. 그건 정말로 두 손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드라이기를 흔들면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움직일 수 없다면 드라이기를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머리를 말리는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제는 드라이기 거치대가 흔해져서 거치대를 두고 머리를 말릴 수도 있고, 더 많은 선택지가 내게 생겨났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많은 선택지는 없었다.
새로 생겨난 평생 노동만큼, 아니 모두가 하고 있는 노동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꽤나 살아가면서 가져야 하는 중요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머리를 감으면서 손목이 아파서 감다가 찌릿찌릿한 통증을 참다가 병원을 가야 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무엇이든 된다는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어떤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잔머리가 내게 존재한다는 믿음 같은 게 생겼다. 나는 12살의 나이에 0살부터 해야하는 일을 다시 배워나가야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아무도 내가 배워야한다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머리가 좋진 않지만, 다양한 접근을 엮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도 이리저리 방법을 굴려보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물론 그렇게 안 되는 일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는 일도 있다는 반대의 길을 가본 것이다. 이 경험이 내게 준 의미가 상당했다.
머리를 감는 그 쉬워 보이는 것이 내 첫 도전이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시작해야 했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