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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5. 2020

보물 찾기에 실패했습니다.

'행복한' 기억 대신 '불행한' 기억 찾기에 성공했습니다.

 아주 쉬운 나의 병명


 해리성 기억상실증. 

 : 기억 상실이 의학적 상태, 신경학적 상태, 지속적인 물질 사용 등에 기인하지 않으며 외상 사건 경험 또는 심한 스트레스 상황 등 주로 심리적 요인에 수반하여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DSM-III-R(APA, 1987) 까지는 이를 심인성 기억 상실이라 명명했으며, DSM-IV (APA, 2000)와 DSM-5(APA, 2013)에서는 해리성 기억 상실로 진단한다.      

 : A. 중요한 자서전적 정보를 회상하지 못하는데, 일상적인 망각에 비해 일관되지가 않으며 대개는 외상성이거나 스트레스성이다. 해리성 기억 상실은 대부분 특정 사건이나 특정 사건들에 대한 국소적, 선택적 기억 상실 또는 개인력과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기억 상실로 나타난다.     


B. 증상이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심각한 고통이나 장해를 초래한다.     

C. 증상이 물질의 생리적인 효과, 신경학적 또는 다른 의학적 상태로 인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D. 이 장해가 해리성 정체감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급성 스트레스 장애, 신체화 증상 장애, 주요 또는 경미한 신경인지 장애에 의해 더 잘 설명되지 않아야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 줄로 요약하면 한 순간에,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다. 태어났을 때를 기억 못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 시절을 기억하지 못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하루하루를 기억하지 못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필 나의 첫 기억, 즉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처음 날은 나의 교통사고 날이다. 웃기지만, 나는 태어나자마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고, 그 날 나는 오른팔을 절단당했다. 과거와 팔을 모두 잃은 이가 되었다.     


 이상했다. 보통은 큰 사고였던 교통사고 장면을 기억하지 못해야 이해가 되는데, 내가 지운 장면은 교통사고 이전의 장면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괴로운 교통사고 장면은 선명히 기억하면서, 평범했던 과거의 장면은 모조리 삭제했다.      


 계속해서 실패했다. 수없이 노력했다. 그 평범한 과거의 기억을, 그 과거의 기억을 잃은 이유를 찾기 위해서. 부모님께 여쭤보기도, 과거의 사진들을 뒤져보기도, 심지어 살던 곳까지 다시 찾아가 보기도. 최면 작업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기까지. 정말로 찾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은 나의 유일한 행복했던 순간들, 다치기 이전의 유일한 기억들이었기에 소중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기억을 잃으면서 같이 잃어버린 나의 감정들이. 나에게 감정은 수식과도 같았다. 흔히 말하듯 A가 입력되면 A'가 나오는 것일 뿐. 그 어떤 마음이나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적인 사람들은 내 주변 투성이인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상했고, 그렇기에 나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 감정을 찾는 연결고리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실패하고, 노력하고, 실패하고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무서웠고, 두려웠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교통사고 장면보다 얼마나 더 큰 충격이기에 나의 무의식은 그 기억을 지웠을까? 찾고 싶으면서도, 찾기 두려운 그런 나의 과거. 나의 감정.      


 그러다 사실 포기했다. 과거를 지운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 때문에. 내가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과거의 모든 ‘나’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를 찾는 것을 멈췄다. 과거의 기억을 지운 나를 받아들였다. 사실은 그냥 실패한 것이지만,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나도 그냥 좀 지나쳐도 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랐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믿었다.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나는 또 그렇게 지냈다.      


 하지만 실패해도 괜찮은 것은 시험이나 요리뿐이었다. 나의 인생은 실패해도 괜찮지 않았다. 내 생각이 변하자 내 기억은, 내 무의식은 나에게 벌을, 경고를 줬다. 그것은 그렇게 내가 찾던 기억. 그리고 느껴보고 싶었던 감정. 그 두 가지는 내게 벌이자 상이었고, 경고이자 안내판이었다. 실패하지 말라고, 실패하면 안 된다고 내가 나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조차 나에게는, 내 의식적인 생각으로는 실패였다. 행복을 느끼고 싶어 감정을 알고 싶었고, 과거의 평범함을 추억하고 싶어 기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 떨어진 것은 그 반대였다. 그래서 아팠다. 고함을 지르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도망쳤다. 내 방에서, 나에게서, 어디로든 도망쳤다. 나에게서 나는 도망칠 수 없지만, 그걸 알면서도 달렸다. 움직였다. 계속 움직이고, 울고, 소리쳤다.     


 절단당하지 않은 오른팔은 나에게 어쩌면 고통의 순간순간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두려워했던 만큼, 현실보다, 미래보다, 나는 과거가 제일 두려웠다. 속된 말로 아주 멀쩡했을 때, 다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때. 그만큼이나 나는 팔을 잃은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두려웠기에 내 팔이 잘린 기억보다 더 먼저 지웠을까? 그리고 그 기억을 찾겠다고 나선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나에 대해 얼마나 몰랐던 걸까? 나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이런 기억을, 이런 두려움을, 이런 아픔을 찾겠다고 발버둥 친 나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순진했던 나는, 순수했던 나는 온통 긍정적인 미래만 꿈꾸고 있었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미래도 상상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기에 미래는, 내가 모르는 것들은 어떤 위험이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야 나는 덜 실패할 수 있었고, 덜 두려워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다. 아니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몰락했다.     


 과연 무엇이 실패였던 걸까? 과연 과거를 모르는 것이 실패였을까?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 실패였을까? 과연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기억과 감정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이 더 두렵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패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역시나 이 모든 것을 알아버린 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은 ‘나’니까. 그러나 나는 두렵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내가 두렵다. 용기가 나지 않으니까. 겁이 생겨버렸으니까. 그러나 이런 나도 받아들였다. 두려워하는 ‘나’도 ‘나’니까.     


 맞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두려워한다. 팔을 자유롭게 쓰던 나의 과거도, 이제는 한 팔로 생활해야 하는 나의 현재도, 한 팔마저도 점점 병들어가고 있는 나의 미래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은 것들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실패했다. 시험이나 요리가 아니라 내 삶에서. 나는 많은 것을 실패할 것이다. 물론 실패를 하고 있기도 하고, 실패를 해왔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삶은, 인생은 성공의 연속도, 실패의 연속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괜찮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실패해도 살아갈 것이고, 성공해도 살아갈 것이다. 나의 삶은 그렇게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갈 것이다.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성공이 많은 삶을 살아왔는가? 실패가 더 많은 삶을 살아왔는가? 그렇다고 당신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말이다.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고, 잘 살아왔다. 그러니 제발 무릎 꿇고 사죄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어나 박수를 쳐라. 그래도 괜찮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 우겨도.     


 나의 실패담은 이렇다. 내가 가진 두려움은 이런 것이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실패담과 더 많은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싫다. 점점 더 겁쟁이가, 점점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그래도, 그래도 그것이 ‘나’라면 ‘나’는 또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도망은, 고함은 멈추고 싶다. 그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더 멋진 실패와 더 아름다운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부모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지인은, 당신의 주변은 무엇을 선택하려고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무엇을 선택해야만 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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