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아빠 없이 자라서
이혼 가정 자녀의 결혼
나는 어릴 때부터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못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자란 것도 아니었고 단란한 가족도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와 둘이 살기 시작하면서는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다. 결혼이 이혼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드라마의 영향도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대사가 나올 때마다 더더욱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빠 없이 자란 티 내니?"
"아빠 없이 자라서."
이혼 가정에서 자란 내가 혹시라도 결혼할 상대나 상대의 부모님께 이런 말을 들으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현실의 대부분 일반적인 사람들은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다.)
사실 난 이런 말을 듣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아빠 없어도 정말 잘 컸다."
나를 혼자 키워낸 엄마를 욕 먹이고 싶지 않았고, 아빠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는 걸 늦게 알았지만. 어쨌든 이십대 후반즈음 내가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친척들은 입을 모아 엄마에게 말했다.
"정말 잘 키웠다. 고생했다."
난 그런 말을 들을 때 뿌듯했다. 그리고 엄마의 고생이 조금이라도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던 어느 해,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나에게 결혼을 하자고 말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남편의 부모님이 나의 상황을 알고 반대하면 어떡하지,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 하지, 내가 맘에 안 드실 때 아빠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등등.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내가 부모님을 뵙기 전에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받고 싶었다. 남편의 집에 처음 인사가던 날 부모님은 나의 집안이나 엄마,아빠에 대해 물어보시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남편이 이미 귀띔을 해놓았고 나를 배려하셨던 것 같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때, 나는 엄마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엄마는 너한테 밥솥 하나 사줄 돈도 없어. 결혼을 이렇게 빨리 해야겠니?"
그랬다. 여전히 나와 엄마는 빚을 다 갚지 못했고 나는 학자금 대출도 남아있던 상태였다. 집은 여전히 월세였고 엄마와 내 월급의 많은 부분이 빚을 갚는데 쓰였다. 나의 힘든 상황을 남편에게도 떠안기는 것 같아 남편에게 결혼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 내가 행복해질 리가 없지.'
나는 속상함에 울며 술을 마셨다. 엄마도 그런 나를 보며 결혼하고 싶어하는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속상했던 것 같다.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함께 하겠다 약속했다. 결국 우리는 커플링 하나 나누어 끼고 결혼했다.
결혼을 걱정했던 엄마는 내가 결혼한 후 18년 만에 푹 주무셨다고 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고서야 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런 엄마의 말이 서운하면서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엄마는 정말 나를 위해 살았구나. 엄마의 18년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결혼을 추진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시부모님은 단 한번도 나에게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친정 엄마,아빠와 할 수 없는 고민 이야기도 들어주시고 조언도 많이 해주셨다. 나는 시댁에 가면 '아, 이런 게 가족이구나.' 라는 걸 느꼈다.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첫 인사를 하고 난 후였다.
저녁을 먹고 가족끼리 거실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일상,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 꼭 TV에서 보던 화목한 가정 같았다. 내가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이었다.
난 크면서 늘 바쁜 엄마와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도 많았고 같이 밥 먹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먹는 게 일상이었다. 스무 살이 넘고서는 나도 나의 사회생활을 한다고 엄마와 더 멀어졌고 그렇게 가족이라기보다 동거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었다.
그런 나에게 시댁 식구들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나의 남편 역시 결혼 생활 10년 동안 부모님의 이혼이나 결핍으로 인한 나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았다.
모든 건 아빠 없이 자란 나의 자격지심이었다. 아빠가 없든, 엄마가 없든 잘 자랄 수 있다. 그리고 그 결핍은 주변에 나를 사랑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로 채울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결혼 생활은 부모님의 선택과는 다를 수 있다. 이혼 가정에서 보고 자란 게 없어서 너도 이혼할 거라던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나는 내 아이가 가족을 떠올리면 거실에 모여 과일을 함께 먹고, 하루에 있었던 일을 공유하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울증이 다시 찾아오고 약을 먹은지 3개월째, 나의 모든 걸 돌아보는 글을 쓰며 치유받고 있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퇴근길에 아이와 먹을 귤을 사본다.